• 최종편집 2025-07-30(수)
 
한국교회 안에서의 성령세례에 대한 연구는 1930년대 이후에야 신학적 논의의 주제로 다루어지기 시작했다. 1920년 이전에는 주로 내한 선교사들의 글에서 성령세례(성신세례)에 대한 언급을 볼 수 있으며, 1920년대에 들어오자 성결교의 김상준, 이명직 그리고 장로교의 윤필성 등이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문헌을 통해 이에 대한 언급을 하기 시작하였다. 1930년대에는 이명직, 이건, 정경옥, 변홍규 등이 구체적으로 성령론을 다룬 글들을 성결교의 ‘활천’과 감리교의 ‘신학세계’에 실었다. 일반적으로 이들의 글에는 당시의 이른바 방언파에 대한 경계와 함께, 성령세례 받은 표적으로서의 방언에 대한 명백한 부정이 나타난다. 그 이유는 당시에 황국주, 유명화, 백남주 등이 거짓 계시와 방언, 예언을 동반하는 종교혼합주의적 영성운동을 확산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때마침 오순절주의 선교사들이 내한하여 활동, 방언에 대한 비판이 강도 높게 일어났던 점을 들 수 있다. 한편, 이 당시 장로교 계통에서는 성령세례의 체험을 강조하는 중국인 교수인 가옥명(賈玉銘)의 ‘성령론’이 평양 장로회신학교의 교재로 사용되었다. 그후 1940년대에는 일제의 탄압에 의해 문서 활동이 제약을 받게 됨에 따라 성령세례에 대해 연구한 문헌이 발견되지 않는다. 1950년대에 들어와서 이명직과 임종우가, 그리고 1960년대에는 김응조, 손택구 그리고 이종규 등의 성결교인들이 성령세례에 대해 연구했고, 장로교에서는 이인한과 박형룡이 성령세례에 대한 구체적인 글을 남겼다. 1970년대에 들어와서는 본격적으로 박형룡의 성령세례론이 시작되는데, 그의 노선은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수학할 때 핫지(Charles Hodge)나 워필드(B. B. Warfield) 등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아 성령 강림의 단회성과 성령 은사의 중단성에 강조를 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장로교에서 중생과 성령세례를 구분하는 입장의 대표적 학자인 차영배의 글이 박형룡의 노선과 대치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전통 오순절주의 노선의 성령세례론을 다룬 조용기의 ‘성령론’이 또한 이 시기에 출판되었다. 1980년대에는 웨슬리안 계통에서 김응조, 김용연, 조종남, 이성주, 한영태 등이 성령세례에 관련 연구를 하였고, 개혁파 계통에서는 차영배, 박영선, 안영복 등의 중생과 성령세례를 구분하는 노선과 신성종, 김해연 등의 중생과 성령세례의 동시성을 강조하는 노선의 신학적 갈등이 눈에 띤다. 1990년대 이후에는 웨슬리안 계통에서 이성주, 성기호, 한영태 등의 조직신학자들과 함께, 이응호, 박명수, 정상운, 주승민, 배본철 등 역사신학자들의 연구가 또한 이 주제에 대한 관심을 나타냈다. 개혁파 계통의 안영복, 하용조는 중생과 성령세례를 구분하는 노선에서 연구했다. 그런가 하면 이 시기에 전통 오순절주의 입장에서 박정렬의 ‘오순절신학’과 함께 조용기의 ‘오중복음과 삼박자 축복’ ‘사도행전 강해’ ‘오중복음 이야기’ 등의 저술이 방언을 중시하는 성령세례를 강조했다. ‘선교와 에큐메닉스 중심의 한국교회사’에서 필자는 한국교회 성령운동사에 대한 분석을 통해 복음적 성령론의 유형을 소개했으며, ‘21세기 예수 부흥’과 ‘성령보고서:사역, 운동, 상담’에서는 성령세례의 이해와 경험을 포함한 ‘성령의 주되심’에 대해서 연구했고, 박사학위(Ph.D.) 논문으로 “한국교회의 성령세례 이해에 대한 역사적 연구”를 제출한 바 있다. 필자의 글이 지닌 연구사적 의미와 독창성은 다음 두 가지 점에 있다. 첫째, 그동안 한국 교계에서 일어난 성령세례론에 대한 여러 혼선과 갈등들을 역사적인 분석을 통해 새롭게 정리한다는 점이다. 둘째, 이제까지 학문적 논제로서는 거의 다루어지지 않던 성령세례의 경험이나 그 능력의 차원을 한국 신학계에 새롭게 부각시키게 된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성령론에 대한 논제는 주로 성령세례의 시기, 중생과의 관계성, 용어 정의, 은사와의 관계성 등에 관한 것이었다. <영성상담 홈페이지 http://bay.p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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