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한국교회 성령론의 형성에 영향을 준 것은 직접적으로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에 걸친 근대 영미 교회를 중심으로 한 성령운동의 결과였다. 당시에는 매우 복잡한 성령운동의 조류들이 있었으나, 크게 보면 개혁파, 웨슬리안파 그리고 오순절파의 세 그룹으로 그 성격이 분류된다. 이 세 조류들은 각각 한국교회 성령론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이들 성령운동의 배경을 살펴보면 18세기 존 웨슬리의 성결론과 17세기 청교도의 성령론 그리고 더 거슬러 올라가서는 16세기 존 칼빈의 성령론에서 그 영향력의 출처를 찾게 된다.
필자는 종교개혁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복음적 성령운동의 저변에는 최소한 칼빈이 제시해 놓은 성령의 내적 증거, 그리스도와의 연합, 성화시키는 능력으로서의 모티브가 짙게 내재되어있다고 본다. 칼빈 사상에 있어서의 성령은 마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인 것과 같이, 그리스도와 인간 사이에 있어서 필수적인 중보자 역할을 한다.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향하도록 하고 그분의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성령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며 우리에게 믿음을 주신다.
칼빈은 성령의 내적 증거에 대하여 논하는데, 여기서 ‘내적’이란 기록된 말씀 그리고 이 기록된 말씀에 기초한 설교 말씀을 외적인 것으로 볼 때, 이와는 상대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칼빈이 ‘하나님이 친히 이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신다’고 할 때, 성령의 사역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내용이 전혀 이해될 수 없다고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신자가 영적인 생활로 나아가기 위한 필연적 조건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하여 우리는 주님의 생명과 성령에의 참여자가 될 수 있으며, 이러한 연합 자체는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일으키는 움직임이 시작될 수 있는 곳은 인간으로부터가 아니며, 그러한 시작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로부터이다.
이와 같은 칼빈의 ‘그리스도와의 연합’ 모티브는 모든 복음적인 성령운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강조되어온 내용이다. 이는 우리 신앙의 근본이 그리스도에게서 말미암으며 또한 우리 신앙의 목표가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일에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믿음에 의해 우리가 그리스도와 만나게 되고,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임을 받게 되는 순간부터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거하시며, 또 우리는 그분의 성령에 의해 살게 된다. 이 같은 중생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는데, 그것은 옛 사람에 대한 억제와 새로운 삶에의 참여이다. 이 두 가지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부터 직접 비롯되어 중생의 최후 목적인 본래의 모습대로 하나님의 형상을 소생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과거에 죄인 되었던 상태에서 이제는 실제로 거룩한 자로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점차 성화되어가는 과정에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죄인이다. 그러므로 성화는 우리가 아직 실제적인 의와는 사실상 상당히 먼 거리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데 달려 있는 것이다.
그러나 중생한 자의 삶이 반드시 금욕이라는 회개의 소극적 측면에 의해서만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비록 신자가 이 땅에서 계속 죄인으로 머물러 있고 저 세상에서야 비로소 자신의 성화를 완성한다 할지라도,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될 때 우리는 결국 승리의 확신을 갖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선택하신 사람들에게 선한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함으로써 그들을 소생시키시고 의롭게 여기신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시는 선택의 은사는 불가항력적인 것이며, 이 은사는 또한 그들로 하여금 죄와 효과적으로 싸우고 거룩한 길로 나아가게 하는 견인의 은사를 수반한다.
이처럼 칼빈의 ‘성화시키는 능력’은 청교도들의 성령론에서 구체화되었으며, 나아가 더욱 정교하게 다듬어지는 웨슬리 성령론의 골격을 이루게 된다. 단적으로 죄와 성화의 교리에 있어서 칼빈이 통시적으로 표현하였다면 웨슬리는 각각 이분법을 적용하였다는 점이 이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점의 핵심이라고 본다.
<영성상담 홈페이지 http://bay.p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