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2-09(월)

칼럼
Home >  칼럼  >  목회자

실시간뉴스

실시간 목회자 기사

  • 세 나무의 꿈 이야기
    어느 산에 세 그루의 나무가 있었다. 그들은 각자 자신들의 미래를 꿈꾸었다. 한 나무는 보석 상자가 되어 세상의 온갖 값진 보석들을 담고 싶어 했다. 또, 한 나무는 사람들을 많이 태울 수 있는 커다란 배가 되어 온 세상을 돌아다니고 싶어 했다. 나머지 한 나무는 하늘에 닿을 수 있을 정도로 높이 자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싶어 했다. 몇 해가 지났다. 첫 번째 나무는 자신이 꿈꾸던 것과는 달리 그저 평범한 여물통이 되어 마소들이 먹는 짚이나 마른 풀을 담게 되었다. 두 번째 나무는 큰 배가 아닌 어부들이 타고 다니는 자그마한 고기배로 만들어졌다. 세 번째 나무도 몸통이 잘린 통나무가 돼 산 아래 통나무 더미에 던지게 되었다. 세 나무는 자신이 꿈꾸던 대로 미래가 이뤄지지 않는 것에 대해 무척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다. 오랜 시간이 지났다. 어느 날 한 젊은 목수와 임신한 그의 아내가 은신처로 마구간을 찾아왔고, 여물통을 정성껏 잘 닦아 새로 태어난 아기의 요람으로 사용했다. 첫 번째 나무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보물, 바로 메시야라는 보물을 담은 상자가 됐다. 그 후 30년이 지나 한 사람이 갈릴리 호숫가에 사는 몇 명의 어부들과 함께 자그마한 고기잡이 배에 올라 사람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전파했다. 그 사람은 물 위를 걸었고, 거친 바람과 파도를 잠재웠으며 병든 자를 고쳐주었다. 고기잡이 배는 고기 대신 그와 함께 진리를 위해 일하는 사람, 사람을 낚는 이들을 태우게 되었다. 그 후로 3년이 지났다. 통나무 더미에 있던 세 번째 나무는 그 사람이 골고다 언덕에서 못 박히는 십자가로 사용됐다.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통나무는 버려졌다가 진리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는 구세주 예수님을 모시는 영광을 입게 됐다. 세 나무의 꿈이 처음에는 이뤄지지 않는 것 같았지만 결국 참된 목적에 소중히 사용됨으로써 미래의 꿈이 성취됐다. 오늘도 이른 새벽부터 일터로 향하는 사람들로 붐빈다. 꽉 막힌 도로, 만원버스, 바쁘게 출근하는 사람들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조건 중에 하나이며 고단한 인생을 살아 내게 하는 긍정적인 꿈을 안고 살고 있을까? 그렇다면 나를 비롯한 지금 독자들의 삶은 어떠한가? 원하는 삶과 사이에 어느 정도 괴리가 있는가? 만일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면 원하는 삶을 살기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가? 지금처럼 살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런 물음에 ‘예’라고 답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과연 얼마나 될까? 아마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긍정적인 꿈이 없을까? 그 이유는 꿈을 목표로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꿈 자체로는 실현될 가능성이 매우 낮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꿈을 이루지 못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고 한다. 꿈을 이루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꿈에 대한 구체적인 이미지가 그려지지 않아서, 일상을 바쁘게 사느라고, 실천하려니 고통이 뒤따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꿈을 가지고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 꿈을 갖는 것이 성공의 절반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오늘은 흑백사진처럼 칙칙한 무채색의 비루한 현실 속에서도 하루하루 소망으로 충만할 것이다. 그리고 몸에서는 엔돌핀이 돌고 도파민이 나오고 세로토닌도 방출될 것이다. 그러기에 꿈이 있으면 영육에 보약이 따로 없다고들 한다. 환경에 지배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꿈이 없으면 방향 없이 흘러간다. 어디로 흘러가는지 모르는 채 표류하기도 한다. 그러다 인생 중반쯤 왔을 때 생계만 남은 거울 속 자신을 본다. 무엇 때문에 그토록 열심히 살아왔는지 모르는 채 현실을 전복시키기에 너무 많은 진도가 나갔기에 돌아갈 수 없는 자리에 머문다. 그렇다면 어떻게 꿈을 성취할 수가 있을까? 꿈을 상상할 때 가장 좋은 방법의 하나는 시각화라고 한다. 흔히 자신이 가고 싶은 곳, 되고 싶은 인물, 갖고 싶은 것을 스크램 해서 붙여 놓는다면 시각적인 동기부여가 된다고 한다. 이는 끌어당기는 법칙인데 구체적으로 상상하는 것이다. 꿈을 이룬 많은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상상화 방법을 사용했다. 고 한다. 인간에게 주어진 능력을 펼치는 방법인데 상상하지 않는 것은 절대로 이루어 질 수 없다. 상상을 해야 무한한 창고에서 에너지를 가져다 쓸 수 있다. 비로써 채널이 맞춰지는 것이다. 이미 다 이룬 것처럼 하면 자연스럽게 그 에너지를 당겨쓰게 된다. 만화가 이현세님의 꿈 이야기이다. 그가 만화계에 발을 들어놓았을 때는 힘들고 아프다고 해봐야 위로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한다. ‘만화 같은 쓸데없는 짓을 하니까 힘들지’ 이런 소리만 돌아올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살아남기 위해서 좋든 싫든 치열하고 맹렬하게 작업하고 만화에 매달리는 것 말고는 다른 곳을 돌아볼 겨늘이 없었다. 만화가로서 꾸준하게 작품을 만들고 인정받기 위해서 결국 만화가 삶의 전부가 되었다.
    • 칼럼
    • 목회자
    2019-07-19
  • 줄무늬 애벌레의 삶이 인간에게 주는 교훈
    오늘 줄무늬 애벌레의 이야기는 1972년 미국의 작가이자 환경운동가인 트리나 폴로스의 ‘꽃들에게 희망을’ 이라는 동화인데 세계의 독자들이 애독하고 있는 베스트셀러요, 신문에 기재된 이야기이다. 내용을 보면 알을 깨고 세상 밖으로 나온 줄무늬 애벌레는 초록빛 나뭇잎을 먹고 또 먹어 몸이 자꾸만 커졌다. 이때 줄무늬 애벌레는 먹는 일을 멈추고 생각한다. ‘그저 먹고 자라는 것만이 삶의 전부는 아닐 거야, 이런 삶과는 다른 무언가 있을 게 분명해’ 애벌레는 먹고 자는 일상적 삶 외에 보다 나은 다른 삶이 있을 것을 생각한다. 줄무늬 애벌레는 이상을 찾아 땅 위 세상으로 내려온다. 그러다 애벌레 기둥을 만난다. 많은 애벌레들이 꼭대기에 오르려고 기를 쓰고 있다. 꼭대기는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줄무늬 애벌레는 사방에서 떠밀리고 채이고 밟히는 생존경쟁을 하면서 그 수많은 애벌레들 속으로 들어간다. ‘밟고 올라가느냐, 아니면 발밑에 깔리느냐 하면서’ 줄무늬 애벌레는 노랑 애벌레를 만나 기둥에서 내려온다. 풀밭으로 내려온 두 마리 애벌레는 사랑을 하면서 행복하게 지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다시 이게 삶의 전부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언가 더 있는 게 분명하다는 생각에 다시 애벌레 더미 속으로 떠난다. 다시 애벌레들 틈에서 정신없이 기둥을 오르던 애벌레는 나뭇가지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늙은 애벌레를 만나게 된다. 늙은 애벌레는 어떻게 하면 나비가 되는가를 이렇게 들려준다. ‘날기를 간절히 원해야 돼, 사는 것을 기꺼이 포기할 만큼 간절하게’ 노랑 애벌레는 몸에서 실을 뽑아 고치를 만든다. 결국 나비가 된다. 애벌레 기둥으로 올라간 줄무늬 애벌레는 경쟁 끝에 정상에 이르지만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애벌레는 애벌레들로 이루어진 경쟁의 기둥이 허상의 기둥이라는 것을 깨닫고 허망해 한다. 순간 꼭대기에 오르려면 기어오르는 게 아니라 날라야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줄무늬 애벌레는 나비로 변한 노랑 애벌레의 멘토링을 받아 나뭇가지에 매달려 고치가 됨으로써 결국 나비가 되어 수많은 꽃들에게 희망을 주는 나비가 된다. 애벌레는 ‘나도 나비가 되고 싶다고’ 고 생각함으로써 나비가 된 것이다. 만일 그런 생각을 하지 않고 계속 기둥의 정상에 머무르기만을 원했다면 나비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이야기가 우리 인생들에게 주신 교훈은 무엇인가? ‘나의 생각’대로 인생을 이끌어간다’는 것이다. 냉정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결코 주위환경이나 다른 사람 탓이 아니다. 원인은 전적으로 나의 생각에 있다. 그러기에 지금 우리의 생각을 바꾸면 그것만으로 행복해 질 수 있다. ‘생각’을 바꾸면 우리는 틀림없이 ‘생각’대로 행복하게 살게 될 것이다. 즉 자신이 바라는 모습으로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우리는 길을 잃지 않고 인생의 정상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팔다리가 없는 40대 중년 남성이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도버 해협을 건너갔다. 그는 필립 크루아종, 프랑스 중서부 도시 생레미쉬르크뢰즈에 사는 사람이다. 1994년 텔레비전 안테나를 고치기 위해 지붕위에 올라갔다가 그만 2만 볼트 전기에 감전돼 팔다리가 모두 절단되었다. 하지만 그는 사고를 당한지 16년째 되던 2010년 9월 18일, 도버 해협을 헤엄쳐 건너는데 성공했다. 오전 8시에 영국 남부 포크스턴 해안에서 출발해 약 13시간을 헤엄치는 악전고투 끝에 밤 9시쯤 프랑스 북부 칼레 해변에 도착했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잘린 두 팔을 번쩍 치켜 들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나 자신뿐만 아니라 불행한 사고로 삶의 의욕을 잃은 사람들을 위해 도전했습니다. 춥고 어깨와 배가 아팠지만 계속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는 오리발 모양의 의족을 달고 헤엄쳤지만 팔에는 의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예상보다 더 빨리 해협을 헤엄쳐 건넜다. 팔다리가 없는 장애인이 34킬로미터 이 구간을 헤엄쳐 건넌 것은 그가 최초이다. 도버 해협은 물이 차고 물살이 거세 수영실력이 뛰어난 사람도 맨몸으로 횡단하기 어려운 곳이라고 하니 놀랍기만 하다. 그는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도버해협을 헤엄쳐 건너는 사람들의 다큐멘터리를 보고 자신도 그렇게 해보겠다는 결심을 하고 1주일에 30시간씩 2년간 훈련해왔다고 한다. 하루 종일 전동 휠체어에 않아 있어야 할 사람이 그런 준비를 하자 무모한 도전이라고 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것은 분명 ‘무모한 도전’ 이었다. 인간은 바다에서 수영할 때 느끼는 두려움이 아주 크다고 한다. 불빛 한 점 없는 캄캄한 밤바다를 거뜬히 헤엄쳐 나갔다. 더구나 그가 도버 해협을 헤엄칠 때 수온은 15도 안팎 정도로 낮았다. 너무 차서 발을 담그지 못할 정도의 한여름 계곡물과 같은 수온으로, 이렇게 수온이 낮으면 저체온 중에 빠지고 호흡 불능에 근육마비가 와 혼수상태가 된다고 한다. 그런데도 그는 시속 3킬로미터라는 빠른 속도로 헤엄쳤다.
    • 칼럼
    • 목회자
    2019-07-05
  • 인생의 벽을 뚫는 사람들
    비즈니스나 인생에서 성공한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할까? 어려운 문제나 벽에 부딪힐때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은 어떻게 판단하고 극복했을까? 어느 날 11세의 고아 소년 해리가 ‘호그와트 마법학교’(마술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런던 강킹스크로스 역 벽을 뚫고 들어간다.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차단된 벽 속으로 해리가 성큼 발을 내디며 들어서자 벽 속에는 마법학교로 가는 특급열차를 기다리는 아이들이 승강장에서 왁자지껄 떠들고 있었다. 그것은 벽이 문이 되는 장면이었다. 이처럼 벽 속에는 문이 존재한다. 벽은 항상 굳게 막혀 이곳과 저곳을 차단함으로써 그 존재가치를 지니는데 그 안에 또 다른 세상으로 나갈 수 있는 출구가 되는 것이다. 해리포터의 작가 조앤 K 롤리에게도 ‘해리포터 시리즈’는 인생의 벽 앞에서 작가 자신이 연 용기의 문이었다. 그녀는 이혼 후 어린 딸을 데리고 생활고에 시달리며 자살까지 생각할 정도로 벽 앞에 서 있었지만 해리포터를 저술함으로서 결국 벽을 문으로 만들었다. 인생은 언제나 따사로운 햇살만 비출 수는 없다. 때로는 ‘시련과 역경’ 이라는 벽 파도에 힘 쓸릴 때도 있다. 그러면 나도 모르게 의기소침해지거나 마치 세상이 리스크만 가득한 것 같아 두려움이 깃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때마다 자신에게 스스로 질문하고 답하기를 한다면 어느 정도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간 축적된 정보나 노하우가 있기 때문이다. 국내 최초 보이스 컨설턴트로 활동하는 김창옥 대표는 스토리텔링 강연으로 인생의 벽을 뚫고 큰 인기를 얻고 있다. 그는 유모와 퍼포먼스로 가미한 자기 고백적 강의를 하고 있는데 큰 인기를 얻고 있다. 그의 어린 시절 ‘불통’의 시간을 보낸 과거 이야기에 청중은 웃다 곧 눈물을 짓는다. 그는 어린 시절 청각장애인 아버지를 보여주기 싫어서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겉으로는 밝은척 씩씩한척하며 살았다. 취업을 하기 위해 공고 전자과에 입학했지만 음악을 하고 싶어 하는 열망의 꿈이 있었다. 하지만 납땜을 배우며 고등학교 시절을 보낸다. 이후 두 번 대학 입시 실패로 도피하다시피 해병대에 입대한다. 전역을 앞둔 어느 날 상상 속에서 미래의 50대가 된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 ‘진정 네가 원하는 일을 하면서 살았니’라는 질문을 던진다. 제대 후 음악에 대한 갈망으로 레슨비가 저렴한 음악과 졸업생에게 부탁해 성학의 기초를 공부한다. 늦었지만 꿈을 위해 독한 마음으로 공부해 5개월 만에 성악과에 입학한다. 하지만 경제적인 어려움은 여전, 학업보다 아르바이트가 주된 생활이었다. 아르바이트 때문에 체력이 떨어지고 성악 실력은 늘지 않자 비관하기 시작한다. 어느날 교수로부터 호된 질책과 격려의 말을 듣는다. 그는 그런 삶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음을 깨닫고 진정한 자신의 목소리를 찾기 위해 자기 혁명을 한다. 무작정 스피치 학원을 찾아가 강의 자리를 부탁했고 스피치 원장은 모험한다는 생각으로 그에게 30분의 강의를 허락했다. 첫 강의에 청중의 반응을 불러일으키는데 성공한다. 청각장애인 아버지, 글 모르는 어머니, 불운했던 어린 시절을 들려주는 자기 공개식 강의 방식을 다듬어 간다. ‘소통’ 즉 자신을 이해하고 사람을 사랑하면 진정한 목소리를 낼 수 있다고 강의한다. 그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무엇에 내 생명을 걸어야 하는가를 모르는 사람이 아니다. 자기 심장이 뛰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에 삶을 걸지 않는 사람이라고 한다. 자신의 가능성을 찾기 위해 계속 도전하느냐 아니면 포기하느냐에 따라 기회의 문이 열리거나 닫힌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자신을 믿지 못하며 삶을 걸 수 없는 사람이라고 강조한다. 우리는 오늘이라는 인생 벽 앞에서 내일이라는 새로운 삶을 위해 김창옥 대표처럼 선택과 결단의 문을 열 때가 있다. 그럴 때 김 대표처럼 고통과 인내의 과정이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내 앞에 있는 인생의 벽을 절망의 벽으로만 생각할 때가 많다. 그래서인지 그 벽속에 있는 희망의 문을 발견할 수 없다. 이처럼 내 앞에 있는 벽을 벽으로만 보면 문은 보이지 않는다. 가능한 일을 불가능 하다고 생각하면 결국 벽만 보이고,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다고 보면 결국 희망의 문이 보일 것이다. 벽 속에 있는 문을 보는 눈만 있으면 누구의 벽이든 희망의 문이 될 것이다. 그리고 꼭 그 문이 굳이 클 필요는 없다. 아무리 좁은 문이라도 하나님께 기도하고(마 7:7~11) 믿음으로 열고 나가면 넓고 넓은 대망의 세상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음속에 작은 문을 가지고 그 문을 굳게 닫고 벽으로 사용하면 이미 문이 아니다. 모든 벽은 문을 만들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 칼럼
    • 목회자
    2019-06-21
  • 우리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
    나는 요즘 실존주의 철학자 생텍쥐페리의 저서 ‘어린 왕자’에 나온 이야기를 읽고 있다. 내용을 보면 ‘어린 왕자’의 첫 장면은 ‘인간’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관한 생텍쥐페리의 생각을 보여주고 있다. ‘어린 왕자’에서 어른은 지구상의 인간 일반을 지칭한다. ‘어린 왕자’의 눈에 비친 지구별 인간의 유형을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왕처럼 군림하는 사람들로 지극히 권위적인 사람, 모든 사람이 자신의 신하인 양 생각하는 이들은 ‘자신’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지만 기회가 있을 때마다 명령하고 주문한다. 주관적 합리성의 감옥에 살며 세상의 기준이 자기인 갑질 인생들이다. 화자는 이런 사람을 ‘절대군주’ ‘우주의 왕’이라고 표현한다. 왕처럼 군림하는 사람은 자기 점검, 자기 성찰, 자기 심판을 말하지만, 그 자신에게는 그것을 적용하지 않는다. 승인되고 정당화된 권위가 아닌데도 자기절대화에 빠진 사람들이 너무 많다. 둘째, 허영심에 가득 찬 사람들.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느낀다. 허영꾼은 자기가 가장 잘 생기고, 가장 좋은 옷을 입고, 누구보다 돈이 많고, 최고로 똑똑하다고 확신한다. 근거 없는 확신에 가득 찼기에 그들은 나르시스트이다. 허영꾼은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물을 필요가 없다. 자기 객관화 능력이 제로인 과잉 자기애 환자들은 늘 행복하며 그 행복은 자기 생산적이다. 허영꾼에 박수를 보낼 것인가? 일침을 가할 것인가? 그 선택이 우리존재의 진실을 말해주는 순간이 있다. 셋째, 술주정꾼이다. 세상에 제일 많은 이들이다. 술 마시는 게 부끄러운지 알지만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다. 실행력이 부족하다. 부도덕적 감정을 갖고 있지만, 도덕적 규범을 지키지 못한다. 많은 사람이 ‘관례였다’ 말하고, ‘어쩔 수 없었다’ 변명한다. 생텍쥐폐리에게 이들은 술주정꾼과 다를 바 없다. 오늘도 세상은 술을 권하며 누구는 홀로 술을 마신다. 넷째, 사업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사업가는 목적 지향적이다. 자나 깨나 별을 센다. 그리고 그 별은 곧 자기 것이라고 주장한다. 욕망을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성취하려는 욕구가 강한 사람, 오직 자기 이해에만 민감한 사람이 사업가적인 인간이라고 생텍쥐페리는 규정한다. 다섯째, 가로등을 켜는 사람으로 명령에 충실하다. 따를 것인지, 거스릴 것인지 명령 자체를 의심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 삶을 기획하지 못한다. 그저 ‘자고 싶다’는 생각만 갖고 있다. 니체가 말하는 ’낙타‘와 같은 인간이며 판단하지 않는 영혼 없는 충성심의 소유자이다. 성실성의 이름으로 보상 받기도 하고 때론 운명론자의 모습을 띠기도 한다. 여섯째, 지리학자이다. 생텍쥐페리는 이론적 인간적인 유형을 지리학자로 표현한다. 그는 서재를 떠나지 못하며 머리로만 세상을 이해한다. 지극히 사변적이며 현실의 치열함을 알지 못한다. 그러면서 원칙을 강조한다. 현실감각 없는 원칙은 이념적 편향성을 선명성으로 착각하게 하며 순수성을 강조한다. 이런 지리학자는 이론과 실천의 변증법칙관계, 즉 자기 생각의 수정과 교정에 대한 감각이 마비돼 있다. 벽창호의 모습으로, 흘러간 옛 노래만을 부르는 지리학자는 구름에서 지상으로 내려오는 두려움을 안고 산다. 자신의 경험을 이론으로 둔갑시키는 지리학자에게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살다보면 우리는 이 고약한 지리학자로 인해 골치 아파하지만 자기 반성력과 새로운 것의 대담한 수용, 그리고 시대 변화 의식이 나를 성장시키는 계기임을 알게 될 것이다. 생텍쥐페리는 앞서 말한 군상들이 20억 명 정도 산다고 말한다.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나? 왕처럼 군림하는가? 허영심에 가득 찼는가? 술주정꾼이나 사업가로 사는가? 가로등을 켜는 사람인가? 지리학자인가? 만일 이렇게 살고 있다면 우리는 실패한 인생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생의 의미를 갖고 보람진 삶을 살아야 한다. 세상에 나를 내놓기로 작정한 사람은 사사로운 일에 연연치 않는다. 사리사욕도 추구치 않는다. 모든 것에는 끼리끼리 모이는 성질이 있다. 그릇이 크다면 공익에 헌신할 것이고 자기만 챙긴다면 내 몸 하나만 건사할 것이다. 하지만 개인만을 위한 삶이 얼마나 허무한지는 살아보면 알 것이다. 그런데 인생은 흔적으로 남는다. 행위로 기록된다. 사는 것과 먹는 것이 거기에서 거기라고 한다면 좀 다른 것을 추구해도 되지 않을까? 먹을거리, 입을 거리, 놀거리, 재산 모으기, 명예, 권력 등에 대한 탐욕은 그만 부려도 좋을 듯싶다. 소유로 사는 것이 아니라 존재로 살기로 마음먹었다면 말이다. 윤정숙 아름다운재단 상임이사는 나눔 운동가이자 기부문화운동가이다. 100개 중 99개는 자신의 것으로 하되, 나머지 1개를 세상에 내놓는다면 세상은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확신에서다. 그래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누는 ‘나눔 롱테일’을 만들었다. 롱테일 기부야 말로 세상을 바꾸는 기적이자 변화의 씨앗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녀는 즐거움 때문에 일을 한다고 한다.
    • 칼럼
    • 목회자
    2019-06-07
  • 향기의 사람- 문학평론가 하재준 장로의 이야기
    사람이 한평생을 살아가면서, 여러 얘기를 종종들을 때가 있다. ‘그 사람 참 좋은 사람이야’ ‘됨됨이가 인간답고 훌륭한 인물이다’ ‘아주 꽃보다 향기로운 사람이다’ 등. 그들은 외로움과 고통을 극복하고 주변을 품어 안는 향기를 뿜어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의 향기는 저마다 다르다. 피워나는 모양도, 빛깔도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결같은 것은 그 향기가 사람을 사랑하게 하고 믿을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나는 얼마 전 친구인 전 신 태인중앙교회 당회장 주호연 목사님을 통해 한국의 수필가요, 문학 평론가인 하재준 장로님의 수필집 ‘천국의 미소와 어머님의 눈물기도’ 라는 책을 받아 펼쳐 보았고, 그 후 그와 만남을 통하여 사람 향기를 느끼게 되었다. 즉 어머님에 대한 지극한 효성, 눈물어린 고학이야기, 수필 등이다. 이러한 하 장로님의 수필을 읽으면서 오물이 뒤섞인 더러운 물속에 뿌리를 내리고 아름다운 꽃을 피워 올리는 아름다운 수련화와 연꽃, 또한 상처 많은 나무가 아름다운 무늬를 남긴다는 말을 생각했다. 그리고 “한 사람을 이해하려면, 그 사람의 어린 시절을 살펴라”라는 정신 분석자 프로이드의 말이 떠올랐다. 이제 한 권의 책, 한 편의 드라마, 한 편의 영화와 같은 그의 가난하고 험난했던 여정, 고독과 가난 속에서 부서지고 믿음으로 용기를 내어 일어났던 그의 삶의 자취를 생각해 본다. 하재준(1941.11.22.). 그는 전북 신태인에서 부 하명용님과 모 김귀례님의 4남으로 태어났으며, 11남매 중 아홉째였다. 그의 아버지는 당시 부의 단위이자 상징인 천석꾼의 거부였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초대 농림부 장관 조봉암의 농림정책인 토지 개혁 정책으로 그 많은 토지가 실제 농사에 종사한 농민들에게 분배됨에 따라 지주몰락사태로 형편이 말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는 아홉째로 태어 낳기에 부모의 여력이 미치지 못하여 가난의 이력은 그의 생애에서 떨쳐낼 수 없는 그림자와 같은 것이었다. 그는 자력으로 학교를 다니기 위해 6.25 직후 열 살인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피 눈물 나는 신문배달로 고학이 시작된다. 당시 가난이 심각할 때라 대부분의 서민들은 초근목피로 생계를 유지하던 때로 신문구독자들이 많지 않아 인근 면까지 배달해야만 했다. 그런 관계로 불과 6, 70부를 배달한다고 해도 3, 4시간을 뛰어야만 했다. 그런데도 피곤하다는 말을 입 밖에 낼 수 없었고 월급이 적다고 불평할 수도 없었다. 당장 그만둔다 해도 뒤를 이어 배달할 사람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그는 새벽 4시 남들이 단잠에 취한 그 시간 신문을 옆에 끼고 문전 문전을 돌아다니며 “신문이요, 신문이요”하고 소리를 높여야 했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날에도, 강추위가 휘몰아치는 거리에도 비옷 하나 내복 한 번 입은 바 없이, 어둠을 헤치며 뛰고 또 뛰어야만 했다. 중학교 1학년 때는 학비도 초등학교 사친회비(당시납입금명칭)에 비하여 많고 써야 할 용돈도 필요해서 밤 10시경에 광주에서 온 신문을 배달했다. 새벽에 조간과 함께 배달하면 다른 아이를 써야겠다고 으름장을 놓은 지국장의 위협적인 말에 꼬박꼬박 밤에 배달하고 보니 밤 11시 30분경에야 집에 돌아오곤 했다. 잠이 부족하나 새벽 4시 으례 퍼뜩 잠에서 깨어 신문을 배달하러 나가지만 졸림은 여전할 때가 많았다. 기차에서 신문을 받아 지국에 오면 지국장이 이부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내가 신문을 세며 순간순간 조는 것을 못 보겠는지, 그렇게 졸리면 내일부터 그만 두어라, 좀 큰 애를 시켜야 하겠다, 너의 사정만 봐줄 수 없지 않느냐는 등 이런 저런 말을 할때마다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신문배달을 그만 두면 학교도 그만 두어야 하기 때문. “졸지 않겠어요. 동작을 빨리 할게요. 잘못 했어요. 앞으로 잘 하겠어요” 이렇게 사과하며 주섬주섬 신문을 들고 지국 문을 나설 때 피가 어린 눈물이 쏟아지고 시간의 아쉬움이 너무나도 절절함을 14세 때부터 피부로 가슴으로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이 후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입학시험에도 합격했다. 하지만 입학금이 없어 다음해로 미루고 등록금 마련을 위해 공장 직공으로 1년간 일하게 되었다. 그 이듬해 고등학교에 입학했고 신문배달을 계속하며 여러 선생님들의 도움으로 졸업을 하게 되었다. 11년간의 신문배달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그는 1964년 전주대학교 국어국문과에 입학하였으나 일 년도 채 되지 못한 2학기 등록금이라는 벽에 부딪쳤다. 할 수 없이 어머니에게 편지를 썼다. “어머니 고학이 이렇게 어려운 일인지를 새삼 절절히 느끼는 순간입니다. 등록금 마련이 도저히 불가능하여 부득이 휴학하려고 합니다”(생략). 곧 10장이 넘은 어머니의 간절한 격려의 회답이 도착했다. 그는 어머니의 편지에 자극을 받아 용기를 내 교무과장과 학장을 찾아갔다. 다행이 교무과장인 이 교수의 도움으로 등록을 마쳤다.
    • 칼럼
    • 목회자
    2019-05-24
  • 강한 바람이 불 때 집을 짓는 까치들
    나는 요즘 시인 정호승 산문집 ‘내 인생에 용기가 되어준 한마디’에 나오는 새들의 집짓는 이야기를 읽었다. 어느 날 그는 우연히 TV에서 까치부부가 집을 짓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장면을 보게 됐다. 까치부부는 도심의 가로수 윗동에다 집을 짓기 위해 끊임없이 나뭇가지를 부리로 물어다 날랐다. 겨울에 사람들이 나무의 윗동을 마치 새총처럼 잘라놔 까치부부가 물어온 나뭇가지는 얼키설키 엮이지 못하고 계속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받침대 역할을 하는 가지하나 남아 있지 않아 집의 기초공사를 할 수 없는데도 까치부부는 거의 한달 동안이나 거리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물어다 날랐다. 까치들은 집의 위치를 기억하고 있어 사람들이 집을 없애버려도, 원래 있었던 그곳에 다시 지으려고 노력한다고 한다. 그때 그는 문득 봄이 오면 왜 꽃샘바람이 꼭 불어오는지, 나뭇가지가 왜 바람에 잔잔하게 부러져 거리에 나뒹구는지 그 까닭을 알 수 있었다. 까치와 같은 작은 새들로 하여금 집을 지을 때 그런 나뭇가지로 지으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만일 꽃샘바람이 불지 않고 나뭇가지가 부러지지 않는다면 새들이 무엇으로 집을 지을 수 있겠는가를 생각했다. 또 떨어진 나뭇가지가 마냥 크고 굵기만 하다면 새들이 그 약한 부리로 어떻게 나뭇가지를 옮길 수 있었을까? 새들은 바람이 가장 강하게 부는 날, 튼튼한 집을 짓더라는 것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까치처럼 바람 부는 날에는 집을 짓지 않고 편안하는 날에만 인생의 집을 지으려 하다가 결국 부실한 집을 짓지 아니했든가를 생각하면서 깊이 뉘우쳤다. 그랬다. 나는 정호승 시인의 말처럼 ‘무슨 일을 하다가 힘들면 나중에 하지‘ 하고 뒤로 미뤘고, 꼭 해야 할 일이 있어도 ‘오늘은 비가 오니까, 몸이 안 좋고 기분도 안 좋으니까’ 하고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곧 잘 내일로 연기했다. 상항이 좋을 때를 기다리자는 의미도 있었지만, 힘든 상황에 일하는 것보다 쉬운 상황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좀 쉽게 일하자는 안일한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날씨를 내 마음대로 바꿀 수 없듯이 좋은 상황을 내 힘으로 만들지 못했던 것을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이제부터라도 남은 생애에 집을 잘 지으려면 어떻게 할까?를 고민하다가 먼저 ‘내 눈에는 희망만 보였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던 강영우 박사의 글을 읽었다.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미국 유학을 갔고, 고난 끝에 한국 최초 맹인 박사가 됐다.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당당히 백악관 공무원으로 입성해 자신과 같은 장애인을 위해 노력하는 삶을 살았다. 6.25 전쟁으로 아버지, 어머니, 누나를 사별하고 슬픔 속에서 사고로 실명까지 했다. 그 후 한국 장애인 최초 정규 유학생이 되어 아내와 함께 도미했다. 3년 8개월 만에 피츠버그 대학에서 교육학 석사, 심리학 석사, 교육 전공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1976년 한국 최초 맹인 박사가 되었다. 그는 정진하면 꿈을 실현하는 성취자가 될 수 있다는 단순한 진리를 믿었다. ‘나는 택시 기사가 승차를 거부하고 버스차장이 밀어내는 멸시와 천대를 받던 인생이었다. 하지만 세계 지도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사회와 국가와 세계를 무대로 봉사하는 사람이 되었다’ 만약 그가 열등감을 감추는 데 급급한 삶을 살았다면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 꿈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역경 중에 주님을 신뢰하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 모래위에 집을 짓지 아니하고 반석위에 집을 지었다(마7:24~27) 이처럼 상황은 같지만 어느 면을 보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 열등감에 집중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부족한 학위, 어학실력, 몇 개 안 되는 자격증, 화려하지 않는 스펙, 가난한 환경, 남겨진 빚, 부모부양, 집안의 가정이라는 무게에 집중하다보면 온전한 자신과 만날 수 없다. 열등감에는 행운의 씨앗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같은 환경에서도 삶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좋은 집이나, 혹은 부실한 집을 지을 수 있다. 다음으로 세계의 최정상급 운동선수들, 세계적인 연주자들, 세계 최고 경영자 협회 회원들, 미국 상하원 의원들, 기자들, 빌보드 차트 1위를 기록하는 가수들, 유명한 배우들을 생각해 보았다. 그들은 대부분 어려운 시기를 인내하며 중간에서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극한점을 넘어. 인생의 정상에 오른 사람들이었다. 어느 분야라고 해서 더 쉬운 분야는 없었다. 모두 강한 바람이 불 때 집을 지었기 때문에 오늘날의 트로피를 쥐었다. 우리가 잘 아는 빌게이츠는 ‘나는 10대 시절부터 세계의 모든 가정에 컴퓨터가 한 대씩 설치되는 것을 상상했고, 또 반드시 그렇게 만들겠다고 외쳤다. 그게 시작’이라고 했다. 그게 그의 꿈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 꿈을 성취했다. 비틀스의 폴매카트니는 ‘꿈을 글로 적는 습관이 비틀스의 성공에 커다란 역할을 했다’고 했다. 시각적 상상, 쓰기를 통해 꿈을 성취하는 것이다.
    • 칼럼
    • 목회자
    2019-05-10
  • 실패를 극복한 한 서예가의 이야기
    일본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10세기 헤이안시대의 서예가 오노도후는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서예공부에 진전이 없었다. 아예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다 싶어 어느 비 오는 날 우산을 쓰고 스승님께 마지막 인사를 드리러갔다. 그런데 스승의 집 앞에서 개구리 한 마리가 불어난 물에 떠내려가지 않으려고 버드나무 가지를 향해 계속 뛰어오르고 있었다. 그는 속으로 ‘너도 나처럼 불가능한 것에 힘을 쏟고 있구나’ 하고 중얼거렸다. 그런데 쉬지 않고 계속 뛰어오르던 개구리가 결국 버드나무 가지를 잡고 나무위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그것을 보고 그는 큰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미물도 저렇게 죽을힘을 다해 나무에 오르는데, 내가 여기서 포기하다니 참 부끄럽구나’ 그는 그 길로 다시 서예공부를 시작, 중국 서체에서 벗어난 자기만의 서체를 완성하고 일본 3대 서예가 중 한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우리에게는 최악일 때가 최고의 기회가 된다. 내가 실패해 절망 중에 있을 때 축복의 손길은 찾아온다. 그런데도 필자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실패 없이 항상 최상을 기대하고 ‘한방’만을 꿈꾼다. 그리고 실망하고 분노한다. 하지만 그런 과정 없이 곧 바로 성공으로 가는 길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노벨문학상을 받았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로 잘 알려진 프랑스 극작가 사뮈엘베게트는 이런 말을 했다. ‘다시 도전하라, 또다시 실패해도 좋다. 이번엔 한결 성공에 가까워져 있을 테니까’ 우리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그것을 밑거름 삼아 희망을 갖고 도전해야 한다. 영문학자 장영희 교수는 그의 산문집 ‘내 생애에 단 한번’에서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에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말이 있다고 했다. 그것은 노인이 죽은 물고기를 지키기 위해 혼신을 다해 상어와 싸우면서 하는 말은 ‘희망을 갖지 않는 것은 어리석다. 희망을 버리는 것은 죄악이다’ 라고 했다. 그리고 장 교수는 ‘희망을 보고도 가지지 않는 것은 빛을 보고도 자신을 어둠속에 가둬버리는 자살행위와 같다’ 라고도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의 삶이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말을 타는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처음부터 말에서 떨어지지 않고 잘 타는 사람은 없다. 아무리 말을 잘 타는 사람도 말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 중요한 것은 말에서 떨어져도 희망을 갖고 다시 올라타면 된다는 사실. 그런데도 우리는 희망과 절망을 구분해서 생각하고 희망을 버리려고 한다. 하지만 하나님을 신뢰하고 희망을 버리지만 않는다면 어떤 큰 고통이나 실패의 고비도 극복 할 수 있을 것이다. 1995년 10월 11일, 40년 동안 수제화를 만들던 남궁정부씨는 사고로 오른팔을 잃었다. 술을 마시고 지하철을 타다 그만 선로에 떨어지고 만 것이다. 병원에서 깨어보니 한쪽 팔이 없었다. 그는 절망했다. 죽고 싶었다. 퇴원 후 그는 의수를 맞추러갔다. 그러자 보조기 가게 주인이 오랫동안 구두를 만들어왔으니 장애인용 구두를 만들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해왔다. 그는 바로 이거다 싶어 곧 일을 시작했다. 그러나 한 손만으로 구두를 만드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구두 한 컬레를 만들기 위해 온몸을 쓰지 않으면 안 됐고, 어떤 때는 칼질을 잘못해 허벅지를 찌르기도 했다. 그가 왼손을 자유자재로 놀리면서 구두 한 컬레를 만들게 된 것은 5년이 지난 후였다. ‘꿈꾸는 구두 5만 컬레’ 라는 책에서 그는 ‘내가 만들어준 신발을 신고 40년 동안 앉아만 있다가, 처음 걷게 되었다는 사람, 맞는 신발이 없어 붕대를 감고 다니다 처음으로 자기 발에 꼭 맞는 신발을 갖게 됐다는 사람을 보면서, 내가 누군가에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돼 무척 기쁘다’고 말한다. 만일 그에게 불행한 사고가 없었다면 그의 말대로 그는 그저 ‘예쁜 구두를 만드는 사람’ 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지금 ‘희망’ 이라는 구두를 만드는 사람이 되었다. 이 또한 불행이라는 고통을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생각한 결과였다. ‘오른팔이 없는게 아니라 오른팔 빼고는 다 있다. 내가 필요한 사람인 것을 깨닫게 하기위해 오른팔이 사라졌다’ 생각함으로써 그는 장애인용 구두를 5만 컬레나 만드는 꿈을 이룰 수 있었다. 이렇게 고통은 선택적이다. 선택은 항상 나의 몫이다. 내가 직면한 삶의 고통스러운 사건 앞에서 내가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하는 것은 오직 나 자신에 달려 있다. 또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온 이 중 남아프리카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자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넬슨 만델라가 있다. 만델라는 정치범으로 독방에 수감 된지 4년째 되던 해 어머니를 잃었고, 이듬해에는 큰아들을 자동차 사고로 잃었다. 아내와 딸은 강제로 흑인 거주 지역으로 끌려갔고, 둘째 딸은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가족을 위해 할 수 있는 아무것도 없었다. 가족들이 자기 때문에 고통 받는다고 생각하며 절망감만 커져갔다. 그렇게 감옥에 있는지 14년째 되던 해 맏딸이 그를 찾아왔다. 전에 손녀의 이름을 지어 달라고 감옥으로 편지를 보낸 맏딸이 손녀의 이름을 물었다. 만델라는 작은 쪽지 한 장을 내밀었다. 딸은 그 쪽지를 조심스럽게 펼쳐보다가 그만 눈물을 흘렸다. 쪽지에 적힌 손녀의 이름은 바로 ‘희망’ 이었다.
    • 칼럼
    • 목회자
    2019-04-26
  • 우물쭈물 하다가 내가 이럴 줄 알았다
    아일랜드의 극작가 겸 소설가 버나드쇼는 1925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이때 한림원은 이렇게 발표했다. ‘그의 작품에는 이상주의자와 인도주의 정신이 깃들어 있고 사람을 감동시키는 독특한 풍자가 곳곳에 숨어 있다.’ 깡마른 체구로 더욱 커 보이는 키, 도사같이 긴 턱수염, 그리고 그에 어울리는 멋진 지팡이는, 보는 이로 하여금 ‘정말 멋지다’는 감탄사를 불러내게 하는 대표적인 이미지였다. 번쩍이는 기지와 시원한 독설은 많은 사람들에게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했다. 사다리에서 떨어진 후 후유증으로 94세의 일기를 마치면서 남긴 마지막 말은 ‘우물쭈물 하다가 내가 이럴 줄 알았다’였다. 이 말은 그의 묘비명에 새겨져 있는데 보는 이로 하여금 많은 여운을 남기게 한다. 왜 그랬을까!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 볼 수 있는 저명한 작가가 아니었던가? 그는 생존시 명예도 얻고 돈도 모았을 것이다. 하지만 임종을 맞이하여 그의 살아온 삶을 회고할 때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을 다 하지 못하고 마침내 그의 생의 마침표를 찍어야 했기에 후회가 되어서 이런 말을 남겼을까?인생을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화두는 ‘삶과 죽음’일 것이다. 젊었을 때는 어떻게 살 것인지, 그리고 나이가 들어가면서는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지를 고민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예고 없이 찾아오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영원히 이 세상을 살 것처럼 여유를 가지고 천년만년 이 세상에 살 것 같이 느긋하게 살아가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우리는 죽음을 준비하지 않고 날마다 돈만을 찾고 있다. 미국 명문대 출신 800명을 조사한 결과 돈을 우선시하는 사람들이 인간관계를 우선시하는 사람들보다 불행하다고 느끼는 비율이 두 배나 더 높다고 하는 통계와 돈에 집착할 수록 경계심과 비교의식이 커지고 더 이기적이며 우울해진다는 연구 결과도 있었다. 기업합병으로 미국 월스트리트의 신화적 존재가 되었던 이반 보에스키는 세계 400대 부자 명단에 처음 올랐을 때 기쁘기는커녕 자신의 명단이 너무 아래쪽에 있어 몹시 우울했다고 한다. 전문 기업사냥꾼이었던 그는 결국 부정행위로 징역 20년의 판결을 받았는데 이는 돈에 사로잡힌 탐욕의 결과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일생을 살면서 돈이 얼마나 많아야 행복할 수 있을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하루를 살아가는데 큰 불편이 없을 정도면 되지 않을까? 그리고 어려운 사람을 도울 수 있으면 족할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다가오지도 않는 미래의 불확실성을 충족하기 위해 오늘이라는 인생의 귀한 시간을 보람된 일을 하지 않고 돈을 버는데 허비하고 있지 않은지 모르겠다. 그런데 돈은 생계가 보장되는 단계만 지나면 행복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한다. 물론 돈이 없어 한 끼의 밥을 걱정해야 하는 사람은 열심히 돈을 벌어야 더 이상 염려 근심을 않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제 필자는 ‘나와 너’ 만남의 철학자 부버의 다섯까지 제안을 소개한다. 첫째는 나폴레옹이 되지 말 것을 권한다. 나폴레옹은 모든 존재를 하나의 가치, 즉 나의 목적에 따라 계산하고 이용 대상으로 간주하는 인물을 상징한다. 목적 지향적 관계와 자기 자신마저도 ’그것‘으로 취급하는 인물의 상징이 나폴레옹 이다. 부버가 생각하기에 우리 모두가 작은 나폴레옹인 셈이다. 둘째로 소유에 집착하지 말라고 말한다. 나의 것, 나의 물건, 나의 창작물과 같은 소유 지향적인 태도는 너마져도 소유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자기 관점과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소유물에 대한 집착이 가져오는 갈등, 타자를 자기와 동일시 하여 고유의 ’너‘를 말살하는 것, 나의 것과 너의 것을 일상적으로 구분하는 것 등이 부버가 말하는 소유의 범주에 포함된다.셋째는 제멋대로 살지 말라고 충고한다. 제멋대로 사는 사람은 외부 세계에 열광하고, 그것을 이용하는데 에너지를 사용하는 사람으로 타인을 의식하지 않으며 그런 이유로 진정한 만남을 갖지 못한다. 즉, 자기중심적인 사람,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사람, 향락적인 사람, 자족형 인간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사람은 너의 목소리에 별 관심이 없다. 그래서 만남도 없다. 넷째는 지성이 아닌 정신으로 존재하라고 촉구한다. 부버는 지성을 목적적 합리성을 추구하는 것, 자신의 관념을 만들고 자신의 성을 구축하는 부정적 능력, 자기감정의 놀이 속에서 사는 능력으로 파악한다. 이에 반해 정신은 지성을 넘어서 ‘너를 말하고 응답하는 능력’으로 상위의 개념이다. 우리가 내적 즐거움을 가지려면 지식이나 테크닉이 아니라 하나의 영혼이자 하나의 정신으로서 다른 영혼과 다른 정신을 만나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대화와 공존으로서의 삶으로서 부버는 나-너의 이념에 기초한 소규모 생활 공동체를 제안했다. 이는 권력 질서에 의해 움직이는 공동체가 아니라 평등과 상호 헌신 및 연대가 실현된 사회이다.
    • 칼럼
    • 목회자
    2019-04-18
  • 참깨 씨와 연꽃 씨 이야기
    어느 마을에 한 농부가 있었다. 봄이 되자 농부는 참깨를 밭에 심으려 했다. 하지만 준비된 씨앗이 없었다. 농부는 고민을 하던 중 마침 먹으려고 냉동실에 보관해둔 참깨 씨를 가져다 밭에 뿌렸다. 내심 싹이 안 나면 어떨까 걱정도 했다. 그런데 그 전 해에 봉지에 담아 보관했던 참깨보다 훨씬 더 많은 싹이 돋자, 농부는 씨를 어떻게 보관하느냐에 따라 좋은 씨앗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한다. 참깨는 영하 20도의 냉동실에서 언젠가는 따뜻한 땅에 뿌려질 날을 고대하며 인내했을지도 모른다. 그 참깨 씨가 예년의 참깨보다 훨씬 더 많은 싹을 나게 한 것은 바로 인고의 결과였다. 만약 참깨가 냉동실의 혹독한 추위를 견디지 못했더라면 아무리 훈훈한 흙의 가슴에 안겼더라도 생명의 싹을 틔우지 못했을 것이다. 작은 참깨 씨 한 알도 시련과 고통을 극복하는 인내의 힘이 있어야 자신을 싹틔울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위기를 믿음으로 극복하고 인생의 승리자가 되어야 한다. 700년 만에 피어난 연꽃 이야기이다. 경남 함안 성산산성에서 발견된 고려시대의 연꽃 씨앗에서 아름다운 꽃이 피어났다. 그 연꽃은 연못의 지하층에서 발견된 10개의 씨앗 중 한 개로 ‘아라 홍련’으로 명명된 꽃이었다.(2010년 7월 8일자 신문) 인간적으로 말한다면 그 연꽃 씨앗은 얼마나 자신을 꽃피우기를 학수고대 했을까? 연꽃 씨는 조건이나 환경이 맞지 않으면 천년이 돼도 싹을 틔우지 않는다고 한다. 이 씨앗도 한 송이 연꽃을 피우기 위해 길고긴 세월을 인내하고 기다렸다. 돌이켜보면 저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지난 세월이나 지금이나 인내하지 못한 일을 얼마나 후회하고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인내 없이 연꽃 씨앗이 꽃을 피울 수 없는 것처럼 우리 또한 인생의 꽃을 피울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이 세상에는 신앙과 믿음이 아니라도 자기들이 추구하는 것을 위해 어려움을 기쁘게 감당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예컨대 저는 어느 책자에서 50년 동안 웃음 배달부로 살아온 영원한 코미디언 남보원씨와 뽀빠이 이상용씨의 이야기를 읽었다. 남씨는 연예계에 힘들게 데뷔했다고 했다. 성우, 아나운서, 영화배우, 탤런트시험을 다 떨어진 뒤 20대 후반에야 영화인 협회가 주최한 ‘스타 탄생’ 코미디 부분에 합격했다. 데뷔 후 첫 무대는 서울 시민회관이었다. 이 때 그는 현인, 최희준 등 당대 인기가수의 성대모사와 팔도 방랑기 등을 쏟아내 인기를 끌면서 이후 원맨쇼의 일인자가 됐다고 했다. 영원한 뽀빠이 이상용씨는 1989년 장교로 군 복무한 점이 인정돼 방송프로그램 ‘우정의 무대’를 진행해 인기 MC가 된 후 시청자들을 즐겁게 한 지 40년이 흘렀지만 젊은 뽀빠이로 살고 있다고 한다. 우여곡절도 많았는데 송해씨가 1925년생, 김동건씨가 1939년생, 그다음 세 번째 ’장수만세‘를 하는 방송인은 이 씨 라고 한다. 이 씨는 요즘도 전국을 돌며 해학과 웃음을 선사한다. 그의 강연제목은 ’인생은 아름다워라‘이다. 어느 날 어떤 작가가 그에게 데뷔 40년에 대한 소감을 물었다. 그는 여섯 살 때를 생각하면 덤으로 인생을 사는 인생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기구한 운명을 안고 태어났다고 했다. ’어머니는 나를 뱃 속에 넣고 아버지가 계신다는 백두산까지 걸어가다가 아버지를 못 만나고 친정인 부여에 오셔서 날 낳으셨지, 병 덩어리, 그 자체였고 못 먹어서 거의 시체이다시피 했지, 주위 친척 식구들이 이런 나를 보고 평생 걱정거리에다 어머니는 시집도 못 가는 신세를 만든다고 땅에 묻어버린 거야, 이를 본 이모님이 묻은 나를 꺼내 솜에 싸서 뒷산으로 도망갔다가 이틀 만에 데리고 내려왔고 이후 6년을 누워서 살았어, 결국 여섯 살부터 걸음마를 시작해 열두 살까지 온갖 병치레를 하면서 겨우 목숨을 이어나갔지‘ 하지만 그는 열세 살부터 아령을 시작해 열여덟 살에 미스터 대전고와 미스터 충남에 뽑혔다고 한다. 1966년에는 미스터 고려대(농대졸업) 응원단장을 지낸 뒤 ROTC 기갑장교로 군 복무를 마쳤다. 제대 후 취직을 못해 번데기와 북어, 다시마 장수 등 22가지 외판원을 하다가 28세 때 TV에 나와 뽀빠이가 됐고 그때부터 ’덤‘ 인생을 살아왔다. ’세상에서 가장 약하게 태어나 가장 건강한 뽀빠이가 됐으니 더 바랄게 있나? 세상 어디에나 무엇에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지‘ 그는 건강 비결에 대한 질문에 ’자신감이지, 자신만만하게 사는 게 제일이냐, 덕분에 나는 아직도 바쁘게 일하고 있잖아‘라고 답했다. 그는 새벽 3시에 일어나 5시30분까지 독서를 하고 두 시간 가량 아령과 역기로 건강을 다진다고 했고, 지금도 팔뚝 근육은 젊은 선수 못지않다고 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술과 커피, 담배를 입에 댄 적이 없고 식혜나 수정과 등을 주로 마신다고 했다. 김영삼 정부 때 여당 측으로부터 대전 지역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할 것을 요구받았으나 이씨는 ’국회의원은 4년밖에 못한다. 나는 영원한 뽀빠이가 되겠다‘며 거절했다고 한다.
    • 칼럼
    • 목회자
    2019-04-05
  • 철학자 김형석 교수의 멋진 인생 Story
    오늘의 시대를 보면 산업발전으로 인한 급속한 발전을 하고 있다. 하지만 정신문화의 성숙은 현저하게 거기에 뒤따르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많은 사회 병리 현상이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특히 가치관의 변화에 따른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적 사고의 팽배로 인하여 이사회는 한층 더 인정이 사라진 황폐한 곳으로 변해가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때에도 우리 사회에서는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은밀하게 베푸는 자들이 있어 잔잔한 감동을 준다. 연세 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 김형석님의 인생의 이야기이다. 그는 30대 중반에 연세대학교에 부임했으나 항상 경제생활에 쪼들렸다고 한다. 학교 교육을 받아야 할 아이들 여섯과 여기에 6.25 전쟁 때 북에서 온 모친과 세 동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쟁 전에 준비했던 몇 푼 안 되는 돈으로 전세방도 구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렇게 살다보니 그의 내외는 수입에 전념해야 했다. 두세 군데 대학에 시간강사로 나서기도 했다. 그가 그의 아내에게 두 곳에서 강연 부탁이 왔는데 어디로 갈까 라고 물으면 그의 아내는 으레 돈 많이 주는 곳을 선택하라고 했고 그도 그랬게 생각했다고 한다. 그렇게 그는 긴 세월을 살았다. 한번은 주초에 대구에서 손님이 왔다. 1년에 한 번 있는 중고등학교 교사수련회가 있는데 600~700명의 교사들을 위해 강연을 해달라는 청이었다. 그는 연세대학교 출신의 교감 선생이었다. 그는 토요일 오후에는 삼성그룹을 위한 선약이 있어 못가겠다고 거절했다. 그 당시에 대구 왕복은 온종일 걸리는 일이었고, 사례금은 삼성보다 적었다. 교통 차편을 제공해주는 삼성을 택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의 거절을 들은 제자는 할 수 없이 빈손으로 돌아가야 되겠다는 충격적인 실망에 빠진 것 같았다. 어떤 죄책감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같은 교육계에 있으면서 대구의 교장회의 결정을 너무 무책임하게 거절한 것 같았다. 그래서 삼성의 양해를 얻고 대구에 다녀왔다. 그렇게 대구에서 돌아온 토요일 저녁에 그는 그의 인생의 커다란 변화를 약속했다. 돈을 벌기 위해 일하는 어리석은 인생관을 극복하고 보람 있는 일을 위해 사는 인생을 찾아 누리자는 결심이었다. 돈을 위해 일생을 다 보내면 내 인생을 어떻게 되겠는가? 보람 있는 일을 하면 돈은 뒤따를 것이라는 신념을 갖기로 했다. 그 선택은 옳았다. 일을 사랑하고 일의 가치를 따지기 시작하면서 그는 사는 보람을 발견했고, 수입이 늘어나는 것도 체험할 수 있었다. 인생관과 가치관의 차원이 한 단계 높아진 것이다. 그렇게 몇 십년을 살면서 여든을 넘긴 연세가 되었다. 자녀들도 제 살림을 꾸려가고 그는 계속된 일의 대가로 노후에도 변함없이 자립을 유지하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그도 모르게 경제관의 변화가 일어났다. 일의 대가로 생긴 수입으로 검소한 생활을 하고 여유가 생기거나 그외 주어진 수입이 있으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일과 사람을 위해 크게 베풀지는 못하더라도 도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때로는 돈을 쓰더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에 쓰자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은 거액의 돈을 사회에 베풀기도 하는데, 중요하고 필요한 일을 위해 내 돈을 쓰면서 일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한 인생인가, 주면서 사는 사람이 받으면서 사는 사람보다 행복하다는 경험을 하는 삶은 누군가에 감사드리고 싶은 마음을 들게 하는데. 그 감사의 대상이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다 라고 했다. 이처럼 남을 은밀하게 돕고 봉사하는 김 교수님은 1920년 평안남도 대동에서 태어날 때부터 병약하였다. 이에 소시 때부터 죽음에 관한 생각과 걱정을 했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크리스마스 때 기독교에 문을 두드렸는데 절망적인 건강 상황이 원인이었다. 같은 해 숭실전문학교에서 1년에 한 번씩 열리는 신앙부흥회(장로교 윤인구 목사, 감리교 김창준 목사)에 참석하여 은혜를 받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다. 그때 처음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건강을 허락해 주시면 저는 건강이 계속되는 동안 나를 위해 살지 않고 아버지께서 맡겨주시는 일을 위해 열심히 살겠습니다’ 약속의 기도를 드렸는데 그 철없는 기도를 하나님께서 오늘까지 기억해 주셨다고 한다. 그 후 일본 조치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후 귀국하여 연세대 철학과 교수, 시카고 대학교와 하버드 대학교 연구 교수를 역임했다. 1960~70년대에는 ‘고독이라는 병’ ‘영원과 사랑의 대화’ ‘예수 어떻게 믿을 것인가’ ‘백년을 살다보니’ 등을 집필하였고 방송과 강연 등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도 김형석 교수처럼 돈과 경제 문제에 있어 확고한 신념을 가져야한다. 돈보다 귀한 것은 형제 사랑이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기 때문이다(행 20:35).
    • 칼럼
    • 목회자
    2019-03-22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