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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 치리권의 효능과 치리회원과의 관계 소고(5)
- 파회 후 총회임원회의 총회권 대행 웬 일인가치리권으로 처결될 안건, 위원회 위탁처결 못해 (승전) 「특권층(세칭 주류)의 주장」: 총회가 끝나면 임원회가 총회를 대행하며, 상비부는 임원회의 지시를 받아야 하며, 심지어는 총회 산하단체까지 일일이 임원회의 관할 하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그같이 시행함. <※이 항목은 오늘도 크게 왜곡되고 있어 필자 나름대로의 소견을 덧붙여 본다.> 정 제8장 제1조에 “…성경교훈과 사도시대 교회의 행사에 의한즉 교회치리권은 개인에게 있지 않고, 당회, 노회, 대회, 총회 등 치리회에 있다…”고 하였으니, 총회임원회가 치리회(당회, 노회, 대회, 총회) 아닌 것이 분명한데, 어떻게 감히 치리권을 행사한다고 하는가? 정 제1장 제7조의 치리권에 의하면 “치리권은 치리회로나, 그 택해 세운 대표자로 행사함을 묻지 않고…”라고 하였으니, 이는 치리회가 회의결의에 의해 치리권을 행사하는 의결기관이면서도, 스스로 그 의결을 집행 하는 집행기관 구실도 하며, “…그 택해 세운 대표자 즉 그 치리회의 회장을 집행기관이 되게 할 수도 있다고 해석된다. 총회가 잔무를 임원회에 맡겼으니 모든 안건을 다 맡겼는데 왜 못하느냐고 하는데, 곰곰히 생각해 보자. 총회에 상정된 모든 안건은 회기 중에 이미 처결한 안건도 그렇거니와 미쳐 처결하지 못한 안건(잔무)도 역시 총회의 치리권에 의해 처결될 안건인데, 이것을 치리회 아닌 임원회가 어떻게 처리할 수 있는가?한국장로교회가 독노회시대도 그랬거니와, 총회설립 당시부터 능률적이며 효과적인 회의운영을 확보하려고 회의법상 「위원회심사의 원칙」 을 원용해 왔다. 즉 전문적인 지식을 요하거나, 혹은 다루어야 할 안건이 너무 많을 경우, 안건의 성격과 종류를 따라, 위원회에 나누어 맡겨 예비적이며 준비적인 심의를 거쳐 본회의에 그 결과를 보고하게 하고, 본회의는 그 보고(즉 다듬어진 안건)를 토대로 다시 의논해서 처결하는 방도를 가리키는 말이다. 예컨대 우리 총회의 상비부제도나 특별위원회 등등이 모두 위원회 심사의 원칙에 의한 위원회이니, 위원회가 결의했다고 해도 그 결과를 본회의에 보고할 권한 밖에, 아무런 다른 효력이 있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다만 전권위원회는 긴급한 상황일 경우, 위원회 결의를 본회의에 보고하기 전에 임시처결을 행하게 할 수는 있으나, 본회의는 그 임시처결이 정당하다고 여겨지면 보고를 그대로 받아 본 처결이 되게 하여 사건을 종결하고, 부당하다고 여겨질 경우에는 위원회의 임시처결을 폐기하고 달리 처결할 수가 있음은 치리권이 치리회에 있고 위원회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그런데도 이 「위원회 심사의 원칙」을 왜곡(歪曲)하는 이들은 치리회인 총회가 총회결의에 의해 행사할 치리권을 임원회나 무슨 위원회에 맡겨 처결할 수 있는 것처럼 여기고 있다. 법은 위에서 본 바 「치리권 원리」 (정 제1장 제7조)대로 택해 세운 대표자에게 치리회 회의결의(즉 치리회가 처결한)대로 그 집행은 위탁할 수는 있어도 치리회가 처결할 치리회의 의안을 대신 처결하도록 위탁할 수 없음은 그렇게 되면 임원회나 무슨 위원회를 치리권을 행사할 수 있는 치리회가 되게 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치리권은 치리회에만 있고(정 제9장 제1조) 치리회 조직은 “당회는 지교회 목사와 치리장로로 조직되고”(정 제9장 제2조), 노회는 “일정한 지방안의 모든 목사와 각 당회에서 세례교인 비례로 파송하는 총대장로로 조직하며”(동 제10장 제2조), “총회는 각 노회에서 파송한 목사와 장로총대로서 조직되는”(동 제12장 제2조) 외에 다른 방도(즉, 임원회 결의로 치리권 행사가 가능하게 하는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치리권은 누가 주는가? 박형룡 박사는 “…교회의 직원들은 비록 회중을 기구로 하여 직임에 나아갈지라도 권세는 그리스도에게 받는 것이다…”(박형룡 교의신학 6권 <서울, 은성문화사 1973. p.159> 하시면서 장로가 회중의 대표로 칭호되는 것은 그가 그들의 선택한 치리자라는 것을 표시한다. 대표의 칭호는 “그 직임 획득의 방식을 지시하고, 그것의 권세의 원천을 가리키지 않는다”는 Porteous의 논평을 인용한다.(The Government of the Kingdom of Christ p.322).그리고 교회헌법은 공동의회에서 선출된 피택장로가 노회의 고시에 합격하고 지교회 당회가 안수임직하면 치리권자가 되고,(정 제13장 제1조~제3조), 목사는 공동의회에서 3분의 2 이상의 가표로 선출되고, 재적교인 과반수의 서명으로 청원한 청빙청원이 노회에서 허락된 후, 노회위임국에서 위임식을 거쳐 치리권자(당연직 당회장)가 된다. (정 제4장 제4조 1.) 그리고 임시목사는 당연직이 아니고 노회의 결의로 당회장 권을 줄 수 있을 뿐이다.(정 제15장 제12조 1). 이와같이 치리권을 주시는 이는 원천적으로 교회의 머리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요, 교회헌법에 의하더라도 장로는 당회요 목사는 노회인데, 그리고 이 권한은 당회의 고유한 특권이요, 노회의 고유한 특권인데, 더욱이 치리권자가 되게하는 당회, 노회라 할지라도 그 방도는 위에서 본 헌법절차 외에 다른 방도가 없는데, 당회도 노회도 아닌 총회가 잔무를 맡긴다는 결의로써 임원회나 무슨 위원회를에 총회(치리회) 회의결의로써만 처결할 수 있는 의안을 맡긴다고 우기는가? 치리회의 의안은 치리회에서만 처결하게 되는 것은 “…성경과 사도시대 교회의 행사에 의한즉 교회치리권은 개인에게(치리회 조직체가 아닌 개인이나 개인의 무리는 물론 무슨 위원회나 임원회도 치리회가 아니므로… 필자 주:) 있지 않고, 당회, 노회, 대회, 총회 등 치리회에 있다”(정 제8장 제1조)함이 장로회정치체제이기 때문이다.「총회재판국 성수」: 「우리(세칭 비주류)의 주장」: “총회재판국은 개회이거나 속회이거나 항상 권 제13장 제134조에 의거 성수가 되어야 재판할 수 있다.(성수 유지의 원칙) 권 제4장 제29조는 재판국의 최종 합의(合議)과정에 있어서의 투표권 규정이요, 따라서 상소가 불가능한 최상급 재판회 이외에는 정회, 휴식을 불구하고 개회 때마다 호명하고 결석자를 회록에 기재케 한다.” 「특권층(세칭 주류)의 주장」: “재판국이 개회 할 때에는 권 제13장 제134조에 의거 성수가 되어야 하나, 속회는 권 제4장 제29조에 의거 성수에 구애없이 재판할 수 있다고 보고(제134조의 규정대로는 성수미달이지만) C교회 사건을 처결하였음. 「적요」: 권 제29조는 최종 합의규정인데, 성수 규정(제 134조) 외면하는 마음. 측은하다고나 할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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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 치리권의 효능과 치리회원과의 관계 소고(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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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대 등반
- 5월이 시작되는 날, 정릉에서 칼바위를 넘어 성곽이 바라보이는 곳에 이르렀다. 외국인 두 사람이 엉뚱한 데로 빠져들고 있어 그 쪽은 길이 아니니 이 쪽으로 가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북한산을 찾는 외국인들이 늘어나는 추세라 가끔은 길을 묻는 이도 있고, 방향을 몰라 서성대는 것을 볼 때면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 안내를 해주곤 한다. 2년 전 2016년 이때쯤에도 성곽 길을 따라 대동문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가벼운 차림의 반바지에 노르웨이 국기가 꽂힌 배낭을 멘 키가 큰 중년의 금발미인과 훤칠하고 중후한 신사와 마주치게 되었다. 의례적인 인사만 하고 내 길을 가려는데 영어를 하느냐고 정중하게 묻는 여자가 한쪽 다리에 피를 흘리고 있다. 물티슈를 꺼내주어 상처를 닦게 하고 알콜로 응급조치를 해주자 고맙다는 인사를 거듭하면서 대화가 시작되었다. 나는 노르웨이가 한국전쟁 때 병원선을 보내주었고 이후 스칸디나비아 병원을 건립해준 은혜를 잊지 않는다고 했다. 이때 남자가 명암을 꺼내어 주는 것을 받아 살펴보니 그는 주한노르웨이 대사(Jan Ole Grevstad)였다.조금 전 두 사람도 성곽 길을 제대로 찾아 오르게 되어 감사하다며 인사를 한다. 스페인에서 왔다는 빌렛(vliet)과 네덜란드에서 온 죤(Joan)은 한국여행이 처음인데 북한산이 대단히 유명하다는 것을 알고 등반을 결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좋은 시간을 가지라고 덕담을 하고나서 나는 북한산에서 제일 높은 곳 백운대로 가는데 그대들은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다. 둘이는 서슴없이 나와 함께 백운대에 오르고 싶다며 따라 나설 자세다. 이에 나는 연전에 은퇴한 목사라서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등반을 하는데 오늘은 두 나그네의 인도자가 되어야 할 것 같다고 했다.성곽 길을 따라 대동문에 이르렀을 때는 낮12시가 넘었다. 근로자의 날이기도 해 많은 사람들이 올라와 곳곳에서 푸짐하게 점심 판을 벌이고 있다. 그들이 이채롭게 보는 것을 감지하면서 점심을 먹을 만한 자리가 있나 주변을 살폈으나 여의치 않아 보인다. 아무래도 좀 더 가서 점심을 먹는 게 좋을 것 같아 20여분을 더 전진한 후에 북한산 대피소에 도달했다. 자리를 정하고 내가 배낭에서 김밥과 바나나, 오이, 과자류와 음료수를 꺼냈다. 한국인들이 등반을 즐기면서 노중에 점심 먹는 것도 보여줄 참이다. 두 사람은 내 눈치를 살피면서 어디서 샀는지 배낭에서 김밥 한 줄과 육포 한 봉지 과자 몇 개에 물 한 병을 꺼냈다. 나보다 체구가 훨씬 크고 젊은 편인데 점심준비가 빈약해 보였다. 내가 짐짓 김밥과 과일을 권하는 대로 받아 먹으면서 옆에서 많이들 차려놓고 즐겁게 먹는 것을 은근히 넘겨보고 있다.아무튼 한국의 풍요로움과 산에서도 넉넉하게 먹는 것을 보여주면서, 배낭에 한 권씩 넣고 다니는 <<산을 품다>>라는 나의 수필집을 꺼냈다. 딸의 결혼식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치르느라 십 여 일 간 채류했던 일과 스페인을 여행한 기행문이 수록된 에세이다. 두 사람이 다 가졌으면 하지만 한 권뿐이라 죤이 빌렛에게 양보하면서 책을 두 손으로 바쳐 들고 기념사진을 찍고서 호연지기가 된 기분이었다. 그러면서 지금부터의 행로는 굴곡이 심한 암반요철지대라 칼바위에서보다 더 힘든 코스라 조심을 더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도 기꺼이 오르겠다는 눈빛들이다. 특공대로 지원한 두 용사를 데리고 적진을 돌파하여 목적을 달성하고 무사히 복귀해야 하는 작전수행과도 같다. 노적봉 삼거리에서 멀리 바위산정의 백운대를 올려다보며 저기가 바로 우리가 점령해야 할 암벽의 요새라며 깃발이 휘날리는 것을 바라보게 했다.우리의 수도 서울에 이렇게 좋은 북한산이 있다는 게 더없이 자랑스럽다. 겨울이 별로 없는 곳에서 온 두 사람이 눈에 덮여 빙판이 되었을 때 내가 사고를 당했던 지점을 통과하게 되었다. 2010년 2월10일 빙판에서 3번을 미끄러지고 넘어지면서 오른편 갈비뼈 3대가 부러졌다. 그때 상황을 이야기 하면서 지금도 나는 계절에 관계없이 어느 산이건 최고봉을 향해 적의 진지를 점령하겠다는 각오와 기도하는 믿음으로 우리나라의 유명산을 거의 다 찾아 몇 번씩 등반하고 있다고 했다. 네덜란드에서 온 죤은 반바지에 배낭을 메었지만 스틱은 없고 신발도 보통 운동화다. 스페인에서 온 빌렛은 그나마도 아닌 평상복차림이다. 북한산 등반길에서 만난 대부분의 외국인들은 이 두 사람처럼 등산복 아닌 평상복 채로 다니고 있다. 최근 들어 우리의 산행열기에 따른 패션유행은 글로벌아웃도어시장을 선도하면서 세계인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런 때문에 전국의 유명산들도 화려해지고 있다.백운대 입구의 '위문'은 사방에서 모여드는 등반객들의 교차로다. 오늘도 다양한 색깔의 등산복 차림들이 북적댄다. 우리도 북새통 대열에 끼어 물 한 모금씩을 마시고서 가파른 암벽에 걸린 쇠줄을 붙잡고 발걸음을 옮긴다. 앞이나 뒤나 뉘나 할 것 없이 씩씩거리며 먹이를 움키려는 야수들처럼 이다. 아니면 꼴인점을 바로 앞두고 혼신의 힘을 쏟고 있는 경주자들의 처절함이다. 북한산 등반의 백미는 백운대다! 누구나 한번쯤 오르고 싶어하는 백운대에 또 올라섰다. 나름대로 빌렛과 죤에게 베테랑의 본을 보여 주었고 뒤따라 올라 온 그들은 최고라는 표시로 내게 답하며 감격해 한다. 두 사람을 축하해 주고, 자랑스럽게 휘날리는 태극기와 백운대라고 새겨진 표지석 앞에서 포옹을 나눈 후에 기념사진으로 말미를 장식했다.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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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대 등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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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리권의 효능과 치리회원과의 관계 소고(4)
- 총회 인정이면 타교회 장로가 우리교회 장로 되나타교단 두 목사, 주류면 정회원 비주류면 비회원? (승전) 그런데 몇분 동안 뒤에 앉았던 총회장이 다시 의장석으로 나서니, 어느 젊은 목사가 총회장의 귓구멍이 썩었습니까? 라고 막말을 하는 상황까지 이르렀을 때에, 총신의 정관 불법변경을 폭로했던 그 회원이 언권을 청하여 허락을 얻게 되자, 서기 단(주류 일색)에서 “집어치워!”, “들어가!” 하고 소리지르니, 그것이 신호였던가 온 회중이 한바탕 떠들어대고 있었다. 마이크를 잡은 회원은 잠시 후 “언권이 여기 있어요.” 하고, 뜻밖에 침착하게 어조를 낮추어 “총회장도 신이 아니니 큰 소리와 작은 소리를 잘못 판단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많은 회원들이 총회장의 표결선언에 항변 하고 있으니, 이런 경우에는 회장이 가부를 다시 묻는 것이 옳습니다.” 하고 발언하니, 집어치워라! 들어가라! 고 떠들어대던 그 회중들에게서, 일제히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발언자의 성향이 비주류이니 의당히 좁은 지역 H노회는 더욱 좁히고, 넓은 지역 N노회는 더욱 넓히자는 안에 부결을 선언한 총회장(비주류)의 선포가 옳다는 뜻으로 발언할 것으로 보아 들어가라! 집어치워라! 고 했었는데, 예상과는 정반대로 가부를 다시 물어야 한다니 그래서 나온 박수가 아니었는가?그러나 발언자는 머리를 푹 숙이고 무슨 큰 죄를 지은 자처럼, 다시 묻는 표결에 참여하거나 그 결과를 알려고 하지도 아니하고 곧바로 숙소로 갔더니, 벌써 어른들 몇 분이 한 발 앞서 숙소로 오사 어두운 얼굴을 하고 계셨다. 발언자가 다가가 “경솔한 발언 용서해주세요” 하였더니, 증경총회장 중 법통으로 불리는 하늘 같은 어른이 “아니야! 오늘 총회장이 홀로 타개하기 어려운 난처한 처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총회장을 도와주셨어! 잘못한 것 아니야!” 하셨으나, “당신 오늘 자살골 또 쏘았어!” 하는 이도 있었다. 발언자가 생각하는대로 제 딴에는 주류측의 잘못도 잘못이지만 비주류 측의 잘못도 잘못이 아닌가? 비주류측의 불법도 불법이라고 지적하니 그때마다 자살골 소리를 들어야 했다. 주님은 “…먼저 네 눈 속에서(티는 물론)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리라”(마 7:5) 하셨는데, 왜 내 눈 속의 들보는 그냥 두고 형제의 눈 속의 티만 빼라 하는가?「성직 투표 위임 없는 인정의 속셈」 : 우리(세칭 비주류)의 주장: 대신 출신 경기노회 P목사(주류)를 정 제15장 제13조에 불구하고 고신측과 합동 당시 이미 가입 된 자들은 그냥 인정하기로 했다더니, 같은 경우의 안주노회 모 씨(비주류 성향)는 정회원이 아니라니 그럴 수가 있겠는가? 평양노회 부정총대 문제로 조직된 교회를 조사했는데, 남의 교회 출신 증경장로를 어떻게 절차 없이 내 교회의 시무장로로 인정하면 내 교회의 시무장로가 되는가? 「특권층(세칭 주류)의 주장」: 왜 사람을 잡으려고만 하는지 알 수 없다. 시한을 정해서 면제키로 한 것이 헌법제정기관인 총회의 결의니 군소리 말고 따라와야 한다. 안주노회 모 씨(비주류 성향)는 믿을 수 없는 분이니까 그 노회가 그렇게 처리한 것이다.법은 투표절차를 받는 것이 옳으나, 조사할 수도 없고, 조사해서 얻는 것 보다 잃는 것이 많겠으니 시한을 정해 인정하기로 총회가 결정했다. 총회는 논의만 해도 법이 되는 것인데 정당한 가결이니 흠잡힐 이유가 없다. 「적요」: 헌법규정을 결의로써 바꾸는가? 일단 혜택을 주려고 하면 왜 주류 인사에게만 적용하고 비주류 인사에게는 적용이 안되는가? 부정이 밝혀졌는데도 남의 장로 갖다 놓았다고 그 장로가 시무장로라니 이런 분들에게 헌법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교인이 뽑지 않은 대표를 총회가 만들었다고 순복하라니 감독정치 교황정치로 아는가? 이렇게 「영구집권체 형성을 위한 노회 불법분리 문제 등」이 끝나고 그 하단에 「현 총회 특권층의 상징적인 죄악상」으로 「총회신학대학 사기극의 전말」, 「적반하장(賊反荷杖)의 총회록 변조」, 「부정총 대 조사 현지답사를 우겨」, 「입과 귀를 막으려는 반개혁주의」인데, 이것은 이미 자세히 살폈으므로 생략하고, 「입과 귀를 막으려는 반개혁주의」 항만 본다. 「우리(세칭 비주류)의 주장」: 주권재민의 민주정치를 취택한 장로회정치 체제 하에서 옳고 그른 것을 표현할 자유는 기본적인 것이다. 문공부에 등록한 문서선교회보를 불온문서 운운하였으니, 정부가 불온문서 발행을 용인하였는가? 말로나 글로나 의사표시의 자유마저 없다면 반개혁주의요, 장로회정치가 아니다.「특권층(세칭 주류)의 주장」: 기독신보는 총회기관지이니 말할 수 있어도, 다른 기관이나 단체는 글도 말도 안하는 것이 옳고, 다만 총회에서만 할 것이다. 그러니 그들의 선동하는 글을 보지 말고 총회를 믿으라. 「적요」: “잘한다! 잘한다!” 하면서 합법이건 불법이건 신신학이건 자유주의건 덮어놓고 수걱수걱 따라가지 못해 미안하오. 우리마저 말이 없으면 당나귀가 입을 열 것이다.아직 남은 것은 「신학적인 입장과 노선 문제」 하의 성경관, 바르트관, 조직신학, 아세아 연합신학원관, 노선문제요, 「총회 운영문제」 하의 총회관, 총회임원의 권한, 사전총회, 특정임원, 성수관, 소원(訴願)으로 시벌, 피상소인 없는 논죄요, 「전권위원을 특권총으로 여긴 정치」 하의 전권위원회는 축소치리회인가? 「합동전권위」를 치리회로 여긴 정치, 수습전권위원회가 양분(兩分)을 인정, 등등인데, 선별해서 보기로 한다.「우리(비주류)측의 주장」: W.C.C R.E.S. 등의 탈퇴, I.C.C.C. 와의 우호관계 단절. “일시적인 전도집회나 부활절 연합예배 등은 초교파적으로 회집하자는 수노회의 헌의가 총회에서 부결된 입장에 엄정확립함.「특권층(세칭 주류)의 주장」: R.E.S. 계의 회집에 L 씨를 파송하여 인사케 하고, 총회가 끝나면 총무 J목사와 정치부장 C목사 등이 총회결의를 짓밟고 해마다 뒤범벅을 만드나 오히려 당연한 것처럼 항상 내세우고 있음.「총회관」 「우리(세칭 비주류)측의 주장」: 총회가 끝나면 파회(罷會)되고, 파회기간 중에는 상비부, 이사회, 특별위원 등이 총회헌법과 규칙에 따르는 직무를 총회의 결의로 위탁한대로 수행하게 되니, 총회결의로 위탁하지 아니하였으면 할 일이 없음. 임원회에 내회장소 결정, 정회 후 개회시마다 회의록을 채택케 되니, 혹시 최종회 회록은 임원회에 맡겨 채택하는 수 있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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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리권의 효능과 치리회원과의 관계 소고(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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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자 유가족 지원과 우리의 생각-하상훈 원장
- 숨진 지 2개월 만에 발견된 증평 모녀의 죽음은 어느 특정한 사람의 죽음이 아니라 우리의 자화상이다. 우리는 인간 비극의 극단적 현상을 또 다시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남편의 자살 후 반년 가까이 두 모녀는 살기 위해서 몸부림쳤다. 전업 주부였던 A씨의 “남편이 먼저 떠나고 난 후 혼자 살기가 너무 힘들다.”라는 유서의 한 마디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는 지난 6개월간 모녀의 도움을 요청하는 손을 잡아 준 사람이 없었다. 가족도 이웃도 국가도 하지 못했다. 아주 큰 구멍이 뚫린 것 같다. 그러나 이제 그저 안타까움과 자책만할 수는 없다. 지금부터라도 자살자 유가족에 대한 본격적인 관심과 지원책을 만들고 실행해야 한다. 이에 필자는 앞으로 재발 방지를 위해 몇 가지 차원에서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자살유가족에 대한 인식개선이다. 미국의 유명한 자살심리학자인 슈나이더만은 자살 유가족들은 가장 큰 정신건강의 피해자들이며 그들은 평생 자살자의 유골을 가슴에 묻고 사는 사람들이라고 하였다. 그들은 자살을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자살자의 가족이라는 사회적 오명으로 심한 수치감과 무력감, 그리고 우울감과 절망감의 홍수에 빠져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지경이 이른다. 그렇기에 유가족들은 밖으로 손을 내밀지 못한다. 그들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으로 인한 상처를 또다시 끄집어내고 싶지 않다. 그래서 도움 요청을 꺼려하거나 두려워한다. 우리 사회는 유가족들도 자살의 피해자로 생각하고, 그들 때문에 고인이 죽은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해 주어야 한다. 또한 우리가 일반적인 죽음에 대해 애도하는 것처럼 그들에게도 정상적인 애도과정을 거쳐 충분히 슬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그래야 그들이 절망의 수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둘째, 자살 유가족에 대한 상담 및 치료이다. 자살 유가족들은 자살한 가족의 모습을 제일 먼저 발견한다. 죽은 고인의 모습을 보는 순간 그들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갖게 된다. 이 장애의 특징은 처음 받은 충격이 계속 재현되는 것이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도 그 상처는 계속된다. 한국생명의전화는 유가족 지원센터를 운영한다. 지난 10년 동안 “희망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란 집단상담 프로그램을 운영해 왔다. 이 프로그램은 같은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사회적 낙인에 대한 불안감을 느끼지 않고 마음껏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심리적 안정을 경험하고 있으며, 이후 매월 개최되는 자조모임에 참여하도록 인도된다. 그리고 전화상담을 통해서 서로 보살피는 기회를 주고 더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한 유가족들에게는 병원 치료를 의뢰한다. 자살 유가족들에게 좀 더 많은 상담과 치료의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셋째, 법적, 제도적 확충이다. 개인차가 있기는 하지만 자살 유가족은 자살 고위험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고인이 없는 세상에서 다시 새로운 역할로 적응하면서 살아야 한다. 남편이 자살로 죽은 사람들은 가사와 남편이 담당했던 경제적 책임을 감당해야 하고, 부모가 자살로 죽은 유자녀들은 다른 기댈 언덕을 찾아 나서야 한다. 유가족들은 자살로 인해 생긴 정신적 충격을 감당하면서 또한 외적, 환경적 적응을 해나가야 하기 때문에 큰 재난을 겪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가족들이 상담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법적, 제도적으로 마련해 주어야 한다. 그런데 개인정보보호법에 의해 그들의 신상을 알지 못한다면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없다. 그들이 직접 도움을 요청해야만 알 수 있다면 이미 그들은 더 큰 위험에 빠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살자 유가족이 발생하면 그들과 접촉하는 경찰이든 동사무소 직원이든 그들이 도움을 받을 수 법률지원, 긴급지원, 상담 및 치료 지원 등에 대한 안내가 반드시 이루어 질 수 있도록 법적, 제도적 장치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넷째, 유가족 지원을 위한 민관 협력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유가족들은 사회적 오명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상담이나 치료를 받으려 하지 않는다. 가령 자살사건 현장에 경찰이 가서 조사하게 될 때, 정신건강복지센터 혹은 생명의전화 같은 민간단체 상담사들이나 유가족 출신 상담사들이 경찰과 함께 가서, 유가족들을 만나 상담을 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향후 유가족 지원 프로그램 및 지속적 상담 치료를 안내하면서 도움을 주는 것이다. 또한 유가족 지원은 정부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경험이 있는 민간단체나 여러 종교단체가 함께 참여하도록 유도해서 심리적 도움과 종교적 위안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도 바람직할 것이다. 이러한 일을 하면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유가족들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지금은 없지만 그래도 이 세상이 살만한 세상이라는 믿음을 갖도록 하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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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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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자 유가족 지원과 우리의 생각-하상훈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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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소원건 「노회경유」 미비 시비
- 총회에도 시찰위원회가 있나 ‘경유미비’가 웬 말?적당한 의안이란 보고 받은 총회, 국의 부정은 반역 한 노회 소속 A교회와 B교회가 합병하려고 하면 두교회가 각각 당회의 결의로 소집된 공동의회 결의를 거쳐 노회에 청원하여 허락을 받으면 족하거니와, (정 제10장 제 6조 5), 소속이 서로 다른 두교회 즉 A노회 소속 a교회와 B노회 소속 b교회가 합병 하려고 하면 제각기 두교회가 당회의 결의로 소집된 공동의회의 결의를 거쳐 소속노회 (즉 A노회와 B노회)에 청원해야 하고 A노회도 B 노회도 합병이 가합하다고 가결 하면, 그것으로 족한 것으로 여겨지기가 쉬울 것이다.만일 그것이 옳다고 하면 a, b교회의 합병으로 A, B 두노회 중 한 노회는 지역이 넓어지고 다른 노회는 지역이 좁아지게 되는데, 이 일을 노회들끼리 주고받기 식으로 할 수 있다면, 노회의 지역을 노회들이 스스로 작성하는 것이 된다.그런데 법은 노회지역을 작정하는 권한은 총회의 직무임을 명백하게 규정한다(정 제12장 제5조 2.).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은 노회지역이 노회 자율에 맡겨졌다면 저마다 넓은 지역을 차지하겠다고 할 것이요, 어느 특정지역에 대해서는 여러 노회들이 서로 자기 지역으로 한다고 다투지 않겠는가? 노회의 지역을 상회인 총회에서 획정 해야 할 당위성을 여기서 찾아보게 된다. 그러므로 노회의 지역이 넓어지거나 좁아질 수 밖에 없는 A노회 소속 a교회와 B노회 소속 b교회 합병은 A, B 두노회가 제각기 가합하다고 여겨지면며 총회에 청원하여 허락을 받아야 합병이 성취된다. (…노회의 지역은 대회가 <대회가 없으면 총회가> 작정하거나 변경할 것이요, 변경할 때에는 대회가 먼저 관계되는 노회들의 허락을 얻어야 한다. …총회가 노회지역을 변경할 수 있는 경우는 대회 조직이 없는 경우에 한한다<본서 438 문답 참조>. 정문: 284문답), 동 377문답은 “노회가 교회를 이명하거나, 이명 오는 교회를 받을 수 있느냐? …① 노회지역은 대회가 작정하는 것이니, 교회가 그 소속 노회를 변경하려고 하면 대회의 허락을 얻어야 하고, 만일 그 교회가 다른 대회지역에 속하였으면 총회를 통해서 대회지역 변경 허락을 얻어야 한다”고 풀이한다. 그런데 전남지방의 A노회 소속 a교회와 B노회 소속 b교회가 위에서 본 정당한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 노회도 모르게 총회도 모르게 저희끼리 합동했다고 하여 장로부총회장을 역임한 K씨 등 3인이 A노회에 소원장을 제출하였더니, A노회는 노회재판회나 재판국이 아닌 “…조사위원 5인(목사 3인, 장로 2인)을 선정하여 처리”케 한다며 일단 소원건 처결을 미루어놓고, 그 A노회 소속 a교회와 B노회 소속 b교회의 합병을 추인키로 하고 집행한 불법을 바로잡아 달라고 총회에 소원하였더니, 총회는 “…귀하가 제출한 소원장은 제102회 총회시 노회경유 미비로 기각되었으니 양지하시기 바랍니다…”(문서번호 본부 102-245, 시행일자 2017년 12월 8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웬 일인가? 도대체 어느 법에 소원장에 하회 경유(經由)가 있어야 한다고 규정되었는가? 경유의 사전적인 의미는 그냥 지나가는 것이 아니고 ‘거치어 지나간다’는 뜻이고, 경유를 풀이하기 위해서는 시찰위원회를 먼저 알아야 하는데, 정 제10장 제6조 9~11를 요약하면, 시찰위원회란 노회를 위하여 교회와 당회를 돌아보고 교회 형편을 노회에 보고하며 지교회와 미조직 지교회의 모든 일을 협의하며 노회 치리를 보조하는 것이니, 시찰위원회란 노회 치리의 방조기구요 지교회들의 협의기구이다. 그러므로 지교회들의 노회 청원건과 헌의건은 반드시 시찰위원회의 사전 협의가 전제되어야 하고, 시찰위원회는 협의과정을 통해서 지교회들이 노회에 제출할 창원건과 헌의건에 대하여 자문(諮問)하며 행정체계를 따라 선도(善導)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경유(經由)란 위의 규정대로 시찰위원회에 협의과정을 거쳤다는 표시요, 그럴지라도 시찰위원회가 치리회가 아니니, “…당회나 교회헌법에 의하여 얻은 직접청구권을 침해하지 못한다” (같은 법 10)고 하였으니, 경유 거부를 당한다고 해도 그 사실을 밝혀 부전(附箋)하면, 노회는 접수하게 된다 함이다. 결국 경유란 하회인 당회가 노회에 청원하거나 헌의할 경우에 시찰위원회를 거쳐야 한다는 규정이다. 그런데 이 규정을 어떻게 노회가 총회에 청원하거나 헌의할 안건에 적용하려는가? 노회가 총회에 청원하거나 헌의하기로 가결하였으면 청원서나 헌의문서를 작성하여 곧바로 문서접수 기간 내에 총회서기에게 제출하면 족한 것은, 총회는 노회처럼 시찰위원회와 같은 방조기구나 협의기구 자체를 두지 아니하였으니 말이다.이 사건은 노회의 처결이 부당하며 불법이라며 총회에 그 처결의 시정을 구하는 소원건이다. 그리고 법이 정한 소원의 절차는 “소원에 대한 통지서와 이유서는 하회 결정 후 10일 내로 작성하여 그 회 서기에게 제출할 것이요, (서기가 별세하였거나, 있지 않거나, 혹 시무하기 불능한 때에는 회장에게 제출한다). 그 회 서기는 상회 정기회 개회 다음날 안에 그 소원통지서와 이유서와 그 안건에 관한 기록과, 일체서류를 상회서기에게 교부한다”(권 제9장 제85조)고 규정하고 있다. 이 사건 관계 노회결의 (즉 소원장을 특별위원에게 맡겨 처리키로 한 결의)는 2017. 4. 18.이고, 소원 통지서를 노회서기에게 제출한 것은 동년 4. 24.이었으니 법규대로 노회결의 후 10 일 이내이니 하자가 없고, 2017년 9월 18일에 개회된 제102회 총회 개회 다음날인 동 9월 19일 총회에 출석하여 총회서기에게 노회에 제출한 것과 동일한 소원관계 일건 서류를 제출하였으니 역시 적법하다. 소원장이란 행정처결의 시정을 구하는 행정재판 요구서이다. 그리고 고소나 소원이 적법하게 이루어졌으면, 재판국은 마땅히 이를 심리하여 판결해야 한다. 그리고 총회는 이 소원건에 대하여 “…서류를 검토하여… 부당한 서류를 기각하거나 적당한 헌의를 총회에 제출할…”(총회규칙 제3장 제8조 3의 4) 헌의부 보고를 통하여 이미 적당한 헌의라고 가결하고 재판하라고 재판국에 위탁하였는데, 국이 미비된 안건(노회경유 미비)이라고 하면 적당한 안건이라고 가결한 총회 선행결의에 대한 반역이 아니겠는가? 그런즉 누가 말하기를 국이 판결하지 아니하려고 엉뚱한 핑계꺼리로 붙여진 것이 법에 없는 「노회경유 미비」라고 한다면 그 말이 맞는가 틀리는가? 답변하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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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소원건 「노회경유」 미비 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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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 합동측 헌법 개정안에 관한 소고 (하)
- (승전) 상소건은 고소장을 제출할 때에 이미 경유과정을 통하여 협의와 행정지도를 거쳤을 뿐 아니라, 이제는 그 차원을 넘어 판결까지 받았는데 그 치리회에 무슨 협의와 무슨 행정지도를 다시 받아야 한다고 경유부전 운운 하는가? 소원기일 이내에 내용증명 혹은 배달증명 우편물로 통지하는 것으로 족하다 할 것은, 접수하거나 말거나 후일에 우체국 소인과 수령증이 통지한 사실을 입증할 것이니 말이다.제 118조 재판국은 본 국원 중에서 국장과 서기를 택할 것이요, 위탁받은 안건에 대하여는 권한이 본회와 동일하여 교회헌법과 노회에서 적용하는 규칙을 사용하되 처리 후 보고한다. ⇒ “…국장과 서기를 택하여 본회의 허락을 받을 것이요…”라고 하였는데, 동 제121조 2.에 의하면 “…2.본 치리회가 폐회한 후 본회를 대리한 재판국에서 재판한 안건은 공포때로부터 본노회의 판결로 인정한다”고, 재판국의 위상을 본회와 동등하게 하고 있어, 회기중 여유가 있으면 조직보고까지 하기도 하나, 나중 판결보고 때에하는 것이 100년 전통이다. 판결문에는 반드시 국장, 서기와 국원들의 서명날인이 있으니 손질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제138조 총회재판국의 판결은 총회가 채택할 때까지 당사자 쌍방을 구속할 뿐이다.⇒ 총회재판국 판결문은 총회에 보고하기 위한 것이며, 총회가 채용할 때까지 당사자 쌍방을 구속할 뿐이다. 다만 재산권에 관한 판결은 예외로 한다.현행 규정에 한자도 바꿀 이유가 없는 완벽한 규정이니 가감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 더욱이 “재산권에 관한 판결은 예외로 한다”니, 판결의 효능도 종류별로 분류하는가? 왜 그래야 하는가?제139조 재판국 서기는 본국 재판사건의 진행과 예심판결을 상세히 조서에게 기재하고, 국장과 서기는 그 조서의 정확을 증명하기 위하여 등본 날인하여 원·피고와 총회 원서기에게 각 한 통씩 교부한다⇒ …총회재판국 판결은 총회가 보고를 채택해야 확정되니, 보고 이전의 판결을 예심판결이라고 한 것이 옳으나 본심 판결이 따로 있는 것처럼 여길 수 있으니 개정안대로 예심판결을 그냥 ‘판결’로 바꾸는 것만 옳아보인다.(2)용어 수정부분제10조 …종용히 사화 하게 하고⇒ …종용히 화해하게 하고, 이의 없으나 조용히를 종용(從容)히로 한 것을 ‘조용히’로 안 고친 것이 아쉽다.제12조 “…방조자를 지명 청구할 수 있고, …방조할 것이다”⇒“변호인을… 돕게 할 것이다” 즉 ‘방조자’를 ‘변호인’으로 바꾸고 ‘방조’를 ‘돕게 할…’로 바꾸었는데, 변호인이란 말을 이해하는 정도이면 방조한다는 말도 알 것 같은데, 왜 바꾸나?제21조 의식송달(意識送達)한 증거⇒의식송달(依式送達), 1993년판의 잘못이었으니 25년간 방치되어 왔었다. 바로 고쳤으니 좋다.제22조 천연적인 고장⇒불가피한 사유, 옳게 고쳐졌다.제27조 2 …방조위원이 치리회의 변호인이 된다⇒ …변호인이 변호인 된다. 건드릴 이유 없다고 본다.제51조 …다시 교회의 종교의식에 출석하면⇒다시 교회의 각종 의식에…, 기왕 고칠 바에는 ‘예배 등 각종 의식에…’ 였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제61조 …심문하는 차서⇒ 심문하는 순서, 무방해 보이고,제90조 …변호인의 방조를 청구할 수 있다⇒ …변호인의 도움을, 무방해 보이고,제93조 …반드시 가책(加責)할 것이요, …권리를 의구(依舊)히 보존하게 한다.⇒ 반드시 ‘문책’할 것이요 …권리를 변동 없이 보존하게 한다. 가책(加責)을 문책(問責)으로 바꾼 것은 옳고, ‘의구(依舊)히 보존’은 예전의 권리를 그대로 보존한다는 뜻인데, 그냥 변동없이 보존에는 예전의 권리란 뜻이 약하게 느껴지니 그냥 두는 것이 옳다.제94조 2. 공소심에는 부득이한 경우에만 증거조를 취급할 수 있고, 상고심에서는 증거조를 폐한다⇒ 항소심에서는 부득이한 경우에 증거조를 취급할 수 있고, 상고심에서는 증거조를 폐하고 법률심으로 한다. 공소심을 항소심으로 바꾼 것에 이의 없고, ‘상고심에서는 증거조를 폐한다’였는데 ‘증거조를 폐하고 법률심으로 한다’로 바꾸고 있다. 제70조에는 “…상소하여 재판 중 긴중한 새증거가 발현되면 상회는 재심하기 위하여 하회로 환송할 수 있고, 쌍방이 상회에서 직결하기를 원하면 상회가 그 증거를 조사하여 판결할 수 있다”고 하였으니, 상고심에서도 증거조사를 할 경우가 없지 아니하다. 현행 그대로 두어도 무방하고, 그냥 ‘법률심이다’로 해도 무방해 보이나 증거조를 폐하고 법률심으로 한다니 곱잡힌 규정 같아 어색하다.제134조 1. “…총회 폐회 후에 결원이 생기면”⇒ “…파회 후에 결원이 생기면, 폐회 후의 결원이 생기면을 파회 후에 결원이 생기면”으로 바꾸었는데, 회의에 문을 여는 것은 개회이고 문을 닫는 것은 폐회이다. 다만 총회는 비상설체 조직이므로 페회하기로 가결하면 회가 없는 상태로 돌아간다고 해서 파회인데, (정 제12장 제7조) 굳이 파회로 바꿀 필요가 있겠는가?(3)오탈자 수정 제2조 권병(權炳)⇒權柄 옳고,제13조 조사 회보케 할 것이요 그 치리는⇒ 그 치리회는 옳고,제20조 치리회가 재판회를 회집하면⇒ 재판회로 회집하면, 옳고 제52조 만 1년간 지난 후 노회 관할에⇒ …노회 관찰(觀察)에 옳고제63조 재판회가 필요로 인증할 때에는⇒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인정될 때에는이 더 좋지 않았을까?헌법적 규칙 한자 및 용어 수정 제1조 교회 신설(新說)⇒ 新設 옳고제3조 교인의 권리, 소원(所願)⇒訴願 옳고,제7조 …정원수 이상을 기록한⇒ 정원수를 초과하여 기록한… 옳고,결국 권징조례 개정안도 내용수정은 제76조 뿐이고, 용어수정부분에 제21조, 제22조, 제51조, 제61조, 제90조와 오탈자 수정 다섯군데 뿐이라고 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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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 합동측 헌법 개정안에 관한 소고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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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동측 헌법 개정안에 관한 소고 (중)
- (승전) 제15장 목사, 선교사 선거 및 임직 제 13조 다른교파 교역자 “…2년 이상 수업한 후…”를 “총회가 정한 소정의 수업…”으로 바꾸었는데, 다른교파 목사를 받아 들일 때도 총회가 수시로 수업연한을 바꾸어야 하는가?제21장 의회 제1조 공동의회 5. 회의 “…부동산 변동은 지교회 규정(정관)대로 하고, 규정이 없는 경우에는 공동 의회 회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결정한다”고 하였는데, “…부동산의 변동은 지교회 규정(정관)대로 하고…”라니, 참으로 안타깝다. 대법원이 “…교단이 정한 헌법을 교회 자신의 규약에 준하는 자치규범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지교회의 독립성이 나 종교적 자유의 본질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교단헌법에 구속된다”(대법원 2006. 4. 20. 선고, 2004다37775 전원합의체 판결)고 하여 교회헌법 위해 정관처럼, 정관 최고규범 판례에 따라 앞으로 교회들이 교회헌법 규정과 다르게 정관을 제정하여 교회를 통치한다고 했을 경우를 생각이라도 해보았는가? 예컨대 목사를 청빙하거나 해임하는 일을 공동의회에서 하도록 규정하고 그렇게 시행할 때에 노회가 금하여 법정 송사를 벌이면 위에서 본 판례대로 “…지교회의 독립성이나 종교적 자유의 본질을 침해하는 것으로 노회가 금할 수 없다고 하게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따라서 총회헌법에 위배되는 정관은 불법무효라는 기준을 세워 공포해야 하겠는데, 도리어 “부동산의 변동은 지교회의 규정(정관)대로 하고…”바꿔요? 건드리지 아니해도 등기를 변경하려면 재적입교인 3분의 2 이상의 결의서를 행정관서가 요구해서 그대로 시행해 오고 있으니 신설 추가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제2조 제직회 “…부동산은 노회의 소유로 한다”를 삭제하였는데, 100년 전통의 교회헌법은 교회부동산을 장리(掌理)권 즉 「관리권」과 「소유권」으로 나누어 지교회 당회는 소유권 없는 관리권만 가졌으니(정 제9장 제6조) 처분할 수 없고, 노회가 가진 지 교회의 토지 가옥 소유권은 장리권 없는 소유권이니(즉 온전한 소유권이 못되니) 역시 처분할 수 없고, 이렇게 해서 부동산 처분은 지교회 당회도 소속 노회도 임의로 처분할 수 없고, 양자의 합의에만 의하도록 해온 것으로 여겨진다. 지교회 부동산인 예배당과 목사주택이 팔리면 교회 기본이 사라지는 중대사여서 그렇게 해 온 것으로 본다.제22장 총회총대 제3조 언권회원3. 본 총회의 증경총회장을 “본총회의 증경총회장과 부총회장으로 「부총회장」을 추가하였는데, 부총회장까지 되었다가 총회장이 못된 분도 언권회원이 되게 한다는 것 보다도 제도상 부총회장으로 그치게 한 「장로 증경부총회장」이 더 좋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2)어려운 단어를 이해하기 쉬운 말로 수정. 신병에 身病이란 한자어를 넣은 것 뿐이니 표제만 거창하다.(3)올바른 단어로 수정 제7장 교회 예배의식10. 권징 1930년 판이 딤전 5:20을 5:12로 되었던 잘못을 바로잡았으니, 88년 동안이나 방치되었던 잘못이다. 그러나 이 항목에서의 성구 오착은 또 한군데 즉. 히브리서 13장 17절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개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이 아니고, 히브리서 12장 6~8절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 하심이니라 하였느니라.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어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가 옳지 않겠는가?제11장 대회 제1조 조직⇒ 「대회조직」 각 치리회 조직 규정에 당회의 조직, 노회조직, 총회의 조직으로 치리회의 칭호가 다 있는데, 대회만 그냥 조직으로 되었다가 「대회조직」으로 되었으니 옳다.제21장 의회 제1조 …목사청빙 투표에는 투표수 3분의 2의 가와… ⇒ …투표수 3분의 2 이상의 가와… 즉 원규정대로면 3분의 2 미달의 경우는 물론 3분의 2을 초과해도 안되는 것처럼 되었었는데 이것을 바로잡았으니 옳다. 다만 “3분의 2 이상의 가와…” 보다는 「3분의 2 이상의 가표(혹은 찬성표)」라 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다.즉 정치개정안 수의건 중 필자가 옳게 여겨지는 조한은 정 제4장 제2조, 제9장 제2조, 제13장 제5조 외에 제7장 10, 제11장 제1조, 제21장 제1조 5 뿐이다.권징조례(교회권징)제76조 “…원고가 상회원에게나 일반 민중에게 대하여 변론서나 요령서를 출간 혹 등사하여…”⇒“출간 혹 복사하거나 기타 수단으로…”, 소송절차를 필했으면 판결할 기관은 오직 사건을 맡은 재판회나 재판국인데, 외부에 변론서나 요령서를 통해, 혹은 기타수단으로 선전하는 행위는 그 의도 자체가 불순하다고 보는 것이 이 조문의 뜻이라 하겠으니, “복사하거나 기타 수단으로”를 추가한 것은 옳다고 본다.제94조 3. “상소인이 소속된 하회가 상소인의 상소통지서 접수를 거부하면 부전(附箋)하여 상회에 상소할 수 있다”를 신설추가하였는데, 이것이 과연 여러해 동안 연구한 개정위원들의 개정안이 맞는가? 헌법이 규정한 시찰위원회란 산하 교회들을 순찰하며, 모든 일을 협의하여 노회에 치리를 보조하는 방조기구이니, 지교회들이 노회에 상정할 일체의 헌의건과 청원권 등을 직접 상정하지 못하고, 반드시 시찰위원회의 협의과정을 거치도록 규정된 것이 교회헌법의 문서제출 경로 규정이다(정 제10장 제6조 9~10) 그리고 경유(經由)란 시찰위원회의 협의과정을 거쳤다는 표시이고, 경유부전(經由附箋)이란 경우가 부당할 경우 그 이유를 적은 작은 쪽지를 붙여 반려하거나, 그냥 반려할 경우 본인이 경유를 요청했던 사실을 적은 작은 쪽지를 붙여 노회서기에게 제출하면 헌의 문서 제출의 정당한 경로를 취한 것이 된다. 그리고 이 경로규정은 처음 상정하는 헌의나 청원건에 국한되는 것이니, 처음 제출이 아닌 상소건은 이 규정과 무관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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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동측 헌법 개정안에 관한 소고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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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경영남장로회 특별강연회 설교
- 어느 시대에나 세대 간극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사기 2장 10절에 ‘그 세대 사람도 다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여호수아 24장 31절에는 “이스라엘이 여호수아의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일을 아는 자의 사는 날 동안 여호와를 섬겼더라”고 했습니다. 이는 여호수아 및 같은 세대 사람들의 신앙과 경험을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알지 못하므로 신앙에서 떠나 우상숭배와 이방족속을 쫓게 된 세대 간극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출애굽기 1장 8, 9절에도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서 애굽을 다스리더니 그가 그 신민에게 이르되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라고 말하며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탄압과 박멸정책을 세워 시행하게 됩니다. 나라 사정이 과거보다 달라진 점도 있겠으나 요셉 시대와는 오랜 세월이 경과한 역사적 시대적 간극이 자리한 때문이었습니다.오늘의 십년은 예전의 백년보다 더욱 시대 격차가 큽니다. 그런 점에서 세대 갈등이란 자연스런 현상이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화의 단절과 이해의 부족이 그 간격을 더욱 벌여놓았고 갈등과 불신을 증폭시킨 점도 있습니다.그러므로 자녀들은 부모세대를 알아야 하고, 부모들은 자녀 세대를 알아야 합니다. 물론 현장과 경험을 공유하지 못하는 입장에서 교과서적 이해는 가능해도 심정적 공감은 어려울 것입니다. 더구나 불신과 선입견, 이념적 기준과 정치적 목적, 시대정신과 대중성향에 따르는 입장일 때 자녀들은 죽었다 깨어난대도 부모세대를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지금 우리네 사회에서 증폭되어 가는 세대간격은 혈육지친인 가정의 부모세대와 자녀세대까지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사이로 갈라놓고 있습니다. 대화불통의 사이로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한민국 건국 70주년의 해에 자녀들이 부모세대와 어떻게 다른 지점에 서 있는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1. 자녀들이 부모세대의 식민지 생활을 압니까?1945년 이전에 태어난 사람들은 짧게든지 길게든지 일본제국의 식민지 통치를 경험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주권을 상실한 망국의 백성이었습니다. 이 강산은 일본 사람이 들어와 주인 노릇했고 한국인은 그들의 식민지 백성에 불과했습니다. 학교에서는 일어가 국어였고 성명까지도 일본식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들의 황민화 정책에 따라 학교는 물론 교회에까지도 신사참배와 동방요배가 강요되었고 나중에는 거부자에 대하여 투옥까지 하게 되었습니다.따라서 죽어지내든지, 이주하든지, 망명하든지, 협력하든지 해야 하는 시대였습니다. 나도 부모님을 따라 네 살 때 만주로 이주하여 거기서 살다가 해방된 이듬해인 일곱 살 때 국경선인 압록강을 빙판으로 건너 조국 땅에 귀환한 입장입니다.나라 잃은 백성으로 태어난 부모세대의 아픔과 설움을 과연 자녀들이 얼마나 압니까?2. 자녀들이 부모세대의 진주군 시대를 압니까?일제시대가 오래갈 줄 알고 있었던 이 땅의 대다수 국민들에게 뜻밖에도 해방의 기쁨이 왔습니다. 정말 예수님께서 도적같이 임하신다 하셨듯이 도적같이 온 해방을 맞은 것입니다. 연합군의 승전으로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게 된 까닭입니다. 하지만 뜻밖에도 38도선 남쪽엔 미국군대가 진주하여 관활하게 되고, 38도선 북쪽엔 소련군대가 진주하여 관활하게 되었습니다. 남한은 진주군 사령관이 하지 중장이었고 아놀드 장군이 군정장관이었으며, 북한은 진주군 사령관이 치스차코프 대장이었고 로마넨코 장군이 군정장관이었습니다. 뜻밖에도 나라가 두동강난 가운데 외국 군대가 들어와 군정을 펴게 되고 건국하기까지 3년간 군정시대를 살아야 했던 게 부모세대였습니다. 내가 내 나라, 내 고향 찾아 귀환한 1946년에 압록강은 국경선이라 치더라도 38선을 넘는데 안내원을 사서 밤중에 몰래 넘어야 했으니 해방되고도 국권이 회복된 게 아니었고 한반도가 분단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다가 좌우 이념의 갈등과 혼란이 극심하여 정말 어려운 시대를 살아온 게 부모세대였습니다. 모든 게 정돈되지 않은 상황에서 교육받아야 했고 연명해야 했으니 정말 서러운 세월을 보낸 세대입니다.3. 자녀들이 부모세대의 건국한 과정을 압니까?해방 후 북한은 계획이 치밀했고 부드러운 포고령 속에 철권을 숨긴 소련군정 치하에서 이내 북한 노동당 단일세력이 그 사회와 인민을 장악하게 했으나 남한은 좌우익 대립과 대결이 매우 치열한데다가 통일정부란 이상론에 치우쳐 오히려 북한의 정치공작을 강화시켜 주는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 한시적으로 남한만이라도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건설해야 한다는 건국의 결단이 내려진 것입니다.북한에선 국민적 지지를 받는 조선민주당의 조만식 장로가 연금되고 기독교 지도자들이 투옥되고 기독교도와 지주계급의 사람들이 남쪽으로 월남하게 되었고 남한에선 남로당계열과 반공정부 수립으로 발판을 잃은 이상적 민족주의자들 일부가 월북하게 되었습니다.이런 와중에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취임하게 되었으니 망국의 세월 38년 만에 내 나라를 갖게 된 그 감격을 체험한 세대가 바로 부모세대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론 반쪽나라로 건국하게 된 허전함도 어쩔 수 없는 감격이었습니다. 이때 소련 지배하의 38도선 이북은 이미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앞서 ‘인민위원회’란 실질적 정부가 수립되어 북한 전역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1946년 2월에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한 임시인민위원회 창설, 3월에 토지개혁 법령 발표, 7월엔 김일성 종합대학 개설, 10월엔 북조선 중앙은행을 임시인민위 직속으로 이관, 47년 1월엔 김일성 신년사 ‘전국 인민에게 고함’ 발표, 2월엔 ‘임시’란 꼬리표를 떼고 ‘북조선 인민위원회’로 조직했습니다. 그러므로 남한의 대한민국 정부수립은 당연지사입니다. 형식상으로 북한이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출범한 날자가 1948년 9월 9일이므로 그보다 25일 앞선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2국가.2체제의 책임을 떠 넘기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지금에선 왜 그 때 통일 정부를 수립하지 않았느냐지만 그 때로선 자칫 실기하면 나라 전체가 공산화 될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음을 부모 세대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만일 그 때 독립운동의 원훈이란 이승만 박사의 카리스마가 없었다면 단독정부의 결단과 난국의 수습은 정말 어려웠을 것입니다.4. 자녀들이 부모세대의 6.25동란을 압니까?건국 된지 이년 만에 동족상잔의 6.25동란이 터졌습니다. 북한 공산군의 전면 남침으로 발발한 이 전쟁은 유엔군의 참전으로 16개국에서 군대를 파견했고 북한쪽에 중공군이 가담하여 서울이 두 번, 평양이 한 번 주인이 바뀌게 되는 치열한 전투 끝에 1953년 휴전하게 되므로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 전쟁으로 3천리 강토는 폐허가 되다시피 파괴되었고 얼마나 많은 군인들과 민간인들이 죽었는지 모릅니다. 외국군대도 엄청나게 죽고 다쳤습니다. 1950년 7월에 국군 참모총장 채병덕 장군이 전사했고, 9월에는 강건 인민군 총참모장이 전사했습니다. 이런 와중에서 소개명령에 따라 피난가야 했고 혹은 적치하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우리 가족은 경산의 자인까지 피난하게 되었는데 낙동강은 물로 건넜으며 나는 아버지 어깨 위에 목말 타듯이 올라타고 건넜습니다. 이런 와중에서 고아가 된 사람이 얼마나 많았으며 외국에 건너간 경우들도 흔하였습니다. 정말 살기 위해 허둥대고 먹기 위해 발버둥 치던 시대였습니다.젊은 청년들은 전쟁에 나가는게 죽으러 가는 길이었고 역에서의 전송장은 눈물 바다였습니다. 한 집에서 몇 사람씩 전사자 아들 생기는게 흔하였습니다. 내가 다닌 학교도 미군이 주둔한 고로 우리학교 학생들은 같은 지역의 고등학교에 곁방살이했고 졸업식도 거기서 했습니다.정말 전쟁의 참화 속에 허둥대며 발버둥질 치며 살아온 게 부모세대입니다.5. 자녀들이 부모세대의 물질적 설움을 압니까?일제시대의 수탈, 해방 후의 혼란, 6.25동란의 상흔과 더불어 정말 가난한 삶을 살아온 게 부모세대입니다. 초근목피란 말이 생소하지 않았습니다. 구호물자로 연명해야 했고 단칸방에 온 식구가 살아야 했습니다. 분뇨 퍼는 사람들이 냄새를 피우며 온 골목을 헤매는 시대였습니다. KBS에 사람 찾는 게 방영되었었지만, 그 때 식구 한 둘 줄이려고 남의 집에 애보기로 보내고 고아원에 맡기는게 예사였습니다. 그렇게 헤어졌다가 서로 만나지 못하여 수십 년 만에, 더러는 반세기를 지나 찾으러 나온 경우들이 있는 것을 봅니다.머리 좋은 아이들 중 집안 사정 때문에 진학 못하고 썩은 아이들이 늘려 있는 판이었습니다. 간혹 그 시절에 외국에 나가도 장학금 받아가되 배타고 긴긴 여행을 해야 했고 결혼한 사람은 가족과 떨어져 몇 년 간이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 보다 훨씬 후인 70년 전후에도 미국에 유학 간 친구 목사님이 한국의 부모님이 각각 별세했을 때 돈만 얼마 붙이고 들어오지를 못했습니다. 신학교 동기생인 내가 그것을 찾아서 전달한 바 있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시대를 살아온 부모세대입니다.6. 자녀들이 부모세대의 경제적 기적을 압니까?나는 4.19, 5.16날 때만 해도 한국이 과연 자력으로 생존하고 번영할 수 있을지에 자신감이 없었습니다. 한국에 원조는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격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60년대부터 경제계획이 1차, 2차, 3차 5개년 계획들을 통해 차곡차곡 진행되고 국민들에게 ‘할 수 있다, 해보자’ ‘우리도 잘 살 수 있다, 잘 살아보자’란 구호가 자신감을 불어 넣어주었습니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잘 살아 보세 잘 살아 보세 우리도 한번 잘 살아 보세’란 새마을 노래가 국민운동가였습니다. 정말 총력동원체제를 통해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 결과 오늘의 경제 토대를 마련했고 언제부터인가 춘궁기도 없어졌고 세계 속의 한국으로 도약하게 되었습니다. 여기 부모님 세대는 땀 흘린 세대입니다. 독일에 광부로, 간호사로, 월남에 군인으로, 민간 기술자로, 중동에 산업인력으로 나가 열심히 일했고 나라 안에서도 모두 새마을운동 및 산업인력으로 마을과 공장에서, 농촌 및 건설현장에서 열심히들 일했습니다. 기능올림픽에 우승한 자들이 영웅으로 대접받았고 공학도들이 인재로 대우받았습니다.이렇게 땀의 댓가로 여기까지 견인한 게 부모세대입니다.7. 자녀들이 부모세대의 격동적 세월을 압니까?부모들이 살아온 세대는 일제와 해방, 건국과 동란, 혼란과 정변의 연속이었습니다. 4.19 학생의거, 5.16 군사정변, 10.27 유신선포, 10.26 대통령 시해, 12.12 군권찬탈, 5.18 광주항쟁, 6.10 부마항쟁, 6.29 직선선언, 최근의 촛불집회와 대통령 탄핵 등 잠시도 바람 잘 날이 없는 격변의 연속이었습니다.이 와중에서도 부모세대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했고 경제성장을 이룩했고 민주주의 토대를 구축하여 오늘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물론 그중에는 산업전사도 있고 민주투사도 있습니다. 하지만 침묵하는 다수는 거창하지도, 생색내지도 않는 생계형 소시민들입니다. 단지 살기위하여, 가족을 돌보고자 한눈 팔 겨를도 없이 열심히 살아온 그들 때문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늘의 후세대는 과실을 공짜로 따먹으면서 그것을 심고 가꾼 부모 세대를 깡그리 무시하고 연령적으로 구분하여 부모세대를 죄인시 해 버립니다.나는 생각컨대 부모세대야말로 아픔과 설움을 지닌 세대이면서도 잡초처럼 그 상황을 뚫고 생존과 번식을 해왔으며 피땀 흘려 일하므로 오늘의 이 나라를 이룩한 자랑스런 분들이라고 여깁니다. 누구보다도 이 땅의 후예들이 자긍심을 가질 수 있는 선대인 것입니다.자녀들에게 부모세대는 안정된 사회에서 몇 세기를 통해 경험할 수 있는 것을 단기간에, 한꺼번에 경험한 세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이 오늘날 느낄 소외감과 허탈감을 헤아려 그 마음을 위로하고 자긍심을 갖겠금 훌륭한 선배로 모실 수 있어야 하고 부모세대는 우리가 흘린 눈물과 땀과 피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구나 여기며 후손들을 기쁨으로 축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할 때 통일한국, 선교한국, 복음한국도 확실하고 분명하며 틀림없이 앞당겨 성취될 것입니다.2018년 3월 13일100주년기념관 소강당대한민국 건국70주년기념예배 및 특별강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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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경영남장로회 특별강연회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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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도산(島山)선생을 기억하다
- 도산 안창호 선생은 한말 일제하에서 온 몸과 마음을 바쳐 조국의 독립을 위해 밤낮을 아끼지 않고 헌신했던 위대한 애국자이자, 민족의 지도자요 큰 스승이다. 3.1운동 백주년을 앞두고 선생의 순국 80주기를 맞이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그의 정신을 계승하며 민족을 새롭게 거듭나게 하고 화해와 협력에 기반한 통일조국을 이룩하는 데에 힘써야 할 때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다시 도산 선생의 삶과 신앙을 되돌아보고 혼탁한 한국사회에서 도산의 진면목을 대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도산은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해 홍코우공원에서 윤봉길의사의 폭탄투척 사건이 발생하자 그날 오후 프랑스 관헌에 체포되어 일경에 인도됐다. 도산은 같은 해 6월초 인천을 거쳐 호송되어 4년형을 받고 서대문과 대전의 감옥에서 복역하게 된다. 또한 도산은 1937년 6월에 소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된다. 수양동우회란 흥사단계열의 혁명적 독립운동단체로 26년 1월에 서울에서 조직됐다. 이 사건으로 마침내 도산은 60세의 일기로 영원히 잠들게 된다. 그리고 3.1운동 백주년을 앞두고 순국 80주기를 맞이하고 있다.도산 선생과 기독교의 만남은 평생의 축복이었다. 18세가 되는 1894년까지 고향에서 서당 수업을 받으며 지내다가 청일전쟁이 끝나갈 1895년경 서울에 가서 공부할 욕심으로 상경하여 언더우드선교사가 설립한 예수교학당에서 3년간 공부하게 되었다. 그가 기독교와 접하게 된 것은 바로 이 예수교학당을 통해서다. 신학문을 공부하는 동안, 도산은 그 학교의 접장으로 있던 송순명으로부터 전도를 받아 예수교에 입교하게 되었다. 이 학교는 뒷날 경신학교로 발전하게 되거니와 성경을 기초로 하여 근대학문까지 가르치는 이 학교에서 도산은 근대적인 사상을 받아들이며 자기성장에 큰 계기를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기독교학교의 기독교교육이 도산의 인격과 사상 형성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도산이 기독교에 들어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나름대로 신앙을 고백하게 되는 것은 늦어도 1895년으로 보인다. 복음을 받은 이후 도산은 곧 기독교의 진리를 전도하고 교회를 건립하는 데에 적극적이었다. 예수를 믿기 시작한 초기에 열심히 전도한 도산의 영향력은 강서군 일대에 여러 교회를 세우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강서군 탄포리(灘浦里)교회는 도산이 평양에서 이곳으로 와서 전도하여 믿게 된 이들이 설립한 것으로 그들이 안창호의 집에 모여 교회를 성립시켰다, 강서군 청산리교회도 안창호의 전도를 받은 이들이 교회를 세웠던 것이다. 이로도교회는 도산의 전도를 받아 세운 탄포리교회와 송호리교회에 다니던 사람들이 다시 세운 것으로 이로도교회와 송호리교회도 또한 도산 선생의 영향력으로 이뤄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이 무렵에 자신이 믿는 기독교의 복음이 자신을 구하고 민족을 구한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혼자서만 간직하지 않고 그것을 널리 전파하는 데에 앞장섰던 것이다. 그는 1897년에 조직된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한편 그 후 5년간 경향각지를 유세하며 청년웅변가로, 애국운동자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고향에 돌아와서는 점진(漸進)학교를 세워 경영하다 1902년 미국 유학에 오르게 되었다. 도산은 미주본토에 상륙한 한인들이 상부상조와 자신들의 품위를 높이기 위해서는 조직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1903년 9월 23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상항친목회를 조직, 회장에 피선되고 교민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전에 비난받던 한인사회가 몰라볼 정도로 정화되고 미국인들로부터 칭찬을 받게 되었다. 1904년 로스앤젤레스 인근 리버사이드로 이주하여 기독교가 운영하는 신학강습소에서 영어와 신학을 수업하게 되었다. 이어서 1905년 한인친목회를 발전시켜 샌프란시스코에서 공립협회를 창립하고 초대회장으로 되었으며, 그 해 퍼시픽 가에 공립협회 회관을 건립함과 동시에 11월 20일에는 『공립신보』를 창간하게 된다. 1907년, 29세의 나이로 일본을 거쳐 귀국한 도산은 신민회를 조직하고 대성학교와 마산도자기회사 및 태극서관을 일으키는 등 국내민족운동을 서두르게 되었다. 이 무렵 그는 대성학교 학생들을 위해 기독교 신앙을 지도하였다. 그는 자신의 젊은 학창 시절 기독교 교육이 큰 도움이 되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910년, 도산은 나라의 운명이 기울어지는 것을 보면서 '거국가'를 남기고 망명의 길에 오른다. 4월 중순 중국 청도에 이르러 '청도회담'을 개최하고 다시 러시아 행 비자를 받기 위해 북경에 갔다가 상해·연태·청도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니콜리스크의 최관흘 목사를 방문, 그와 함께 국민회 확장과 기독교 전도활동에 나서기도 했다. 3·1운동이 발발했을 적에 도산은 1919년 3월 13일 북미 샌프란시스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위원회 석상에서 <3·1운동을 계승>이라는 제목으로 연설을 한 것으로 전한다. 여기서 그는 하나님의 지휘명령 아래서 독립운동을 추진할 것이라는 의지를 표명하는 한편 종교계(기독교계)가 한국 기독교도의 참상을 널리 고하고, 위하여 기도하며 비인도적인 일본인의 만행을 세계에 폭로해야 할 것을 당부하였다. 그가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에 있다가 다시 귀국하여 중국과 시베리아를 경유하여 또 미국으로 건너가 흥사단(흥사단)을 조직하고 샌프란시스코, 뉴욕, 시카고, 상해, 그리고 멕시코에까지 그 지부를 두는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광범위한 독립운동을 펼쳤는지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교통과 통신이 불편한 그 당시 도산은 태평양과 아시아대륙을 종횡으로 수차 뛰어 다녔으니 이런 활동은 오늘날에 있어서도 쉬운 일이 아니기에 이역만리에서 고초가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도산은 '우리 2천만 동포가 모두 손에 신약전서를 한 권씩을 가지는 날에는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고 외쳤는가 하면, 민족의 희망을 기독교에서 발견한 선각자이며 기도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또한 나라를 위하여 밤을 밝히면서 근심하고 회개하면서 희망을 가졌다. 그는 기독교에서 민족의 희망을 보았다. 그러기에 선교사들이 가져다 준 정교분리의 신앙이나 민족이 빠진 신학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그의 신앙은 당시의 민족현실을 외면하지 않으려 했고, 민족문제를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그 앞에서 해결점을 찾으려 했던 신앙이다. 그는 민족문제를 추구하는 신앙인인 한편 의와 사랑의 보편적인 가치를 갈구했던 기독교인이었다.도산 선생이 가진 사상의 근원은 기독교의 성경과 체험적 신앙이라 할 수 있다. 그가 18세의 나이로 서울에 올라와서 선교사들을 통해 구세학당에서 처음 만나게 된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일생을 이렇게 이끌었던 것이다.특히 도산의 독립운동은 다른 어떤 독립운동 지도자들보다 큰 틀과 구체적 계획을 갖춘 뛰어난 경륜이 담겨 있었다. 그는 좌우파의 대립과 갈등 속에서 통일단결을 일관되게 추진했다.순국 80주기를 맞아 도산 선생은 조국의 독립과 번영을 위해 헌신한 애국자의 본보기이자 국가 지도자의 귀감으로 선생의 신앙인격과 교훈은 시대성을 초월해 우리 속에 현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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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도산(島山)선생을 기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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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동측 헌법 개정안에 관한 소고 (상)
- 시무목사 3년독재 용인, 위임목사들의 생색이냐청빙과 같은 절차로 해임결의 없으면 계속 시무케 교단 설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헌법 전면개정위원 15인을 선정하여 개정작업을 시작한지가 2012년 9월 대구성명교회에서 회집된 제97회에서였으니, 어느덧 5개 성상을 훌쩍 넘겼다. 그런데 2018. 2. 6자 기독신문(28면)에 게재된 개정안 수의 공고에 의하면 「헌법 정치 개정안」이 개정, 추가, 용어수정, 성구교정 등 17개 조항이고, 「헌법 권징조례」가 오탈자 수정 다섯군데를 포함해서 24개처에 불과하니 양적으로는 미흡하다 하겠으나, 질적으로는 오랫동안 기도하며, 연구하며, 여론을 종합하며, 정성들여 공들여 최선을 다 하였으니, 최상의 작품이 되었으리라고 본다.우선 헌법의 칭호에 대하여 「정치」라고 불리는 헌법은 1922년 판 헌법 이래로 「조선 예수교 장로회 정치」였다. 그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역대 총회록을 다 살펴도 이 칭호를 개정한 적이 없으니, 8.15 해방 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로 바뀐 것 같이, 「대한예수교 장로회정치」가 된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라 하겠고, 이 칭호가 1930년 판에 이어 고려측과 합동한 후 첫 판인 1964년 판까지 그대로 이어졌으나, 1966년 판 헌법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정치」로 바뀌었는데, 「대한예수교 장로회 정치」란 칭어가 너무 길어서「정치」라고 약칭한 것을 그냥 받아들여 왔으나, 정치는 세상에도 있으니 「교회정치」라고 바로 잡혔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그리고 「권징조례」도 당당한 교회헌법인데, 굳이 「조례」라고 하여 세상나라의 법률체계 중 국회가 제정한 법률도 아니고, 대통령의 긴급조치, 위임명령, 집행명령 수준의 법규도 아니고, 겨우 지방자치단체가 제정하는 최하위의 규범인 「조례」 「권징조례」가 옳겠는가? 「정치」를 「교회정치」로 바꾼다면, 권징조례도 「교회권징」으로 바뀌기를 기대해본다.정 제 4장 목사 제 2조 목사의 자격 “…연령은 만 29세 이상 자로 한다.”고 하여 본래 30세에서 한 살을 줄였는데, 1960년 판 이래로 “만 27세”였었으니 별 이견(異見)이 없으나, 조문의 표현이 “…만 29세 이상 자로 한다” 보다는 “…외인에게도 칭찬을 받는 자로 연령은 만 29세 이상이어야 한다”였었으면 하고 생각해 본다.제3조 목사의 직무 “7. 동성애자와 본교단 교리에 위배되는 이단에 속한 자가 요청하는 집례를 거부하고, 교회에서 추방할 수 있다”고 신설 추가하였는데 뜻은 가상하나 그 사이도 성경(레 18:22, 20:23, 롬 1:27, 고전6:9, 딤전 1:9~10)대로 믿는 교회들이 배격해 온 죄악이니, 신설 추가 할 이유가 없으며, 뿐만 아니라 혼례식 규정은 예배모범 범주에 속하는 규정인데(예배모범 제12장), 교회행정관계 규범인 「정치」와는 무관한 일이라고 본다.제4조 목사의 칭호 2. 전임목사 임시목사를 시무목사로 바꾸었었는데, 다시 「전임목사」로 바꾼다니 잘 된 것으로 본다. 다만 3년 임기 중에는 목사가 홀로 교회를 다스리는 독재정치가 되는데, 독재정치를 배격하는 장로회정치 체제에 반하지 않는가? 임기 1년은 그대로 두고, 만기 후 청빙 청원과 동일한 절차(공동의회 3분의 2 이상의 찬성표, 재적입교인 과반수의 서명날인을 가리킨다)에 의한 해임청원이 노회에서 가결되기까지 계속 시무토록 하면 해임청원을 아무 때 이건 할 수 있어 3년 동안은 해임청원도 못하게 막아놓은 현행 규정과 다르다. 그리고 해임청원이 없으면 사실상 정년까지 시무하는 위임목사와 같고, 해임청원이 될 정도가 되었으면 스스로 교회를 사면해야 하지 않겠는가? 왜 이렇게 못 바꾸는지 답답하게 여겨진다. 더욱이 「제15장 제12조 시무목사의 권한」 규정은 그냥 두었으니, 웬 일인가? 한쪽은 전임목사, 한쪽은 시무목사인가?8. 군종목사 9. 군 선교사 「8. 군종목사」를 위와 같이 둘로 나누었는데 굳이 그럴 이유가 없어 보인다. 더욱이 국내 전도는 「전도」, 외국 전도는 「선교」로 호칭해 온 장로교회의 100년 전통을 왜 깨고 다른 교파를 닮아야 하는가? 군인교회가 외국 전도인가?제9장 당회 제1조 당회조직 “당회는 지교회 목사와 치리장로로 조직하되…”를 “당회는 노회의 파송을 받아 지교회를 담임하는 목사와 치리장로로 조직하되…”로 바뀌었는데, 공연한 군더더기로 여겨진다. “지교회 목사”라면 의당히 노회의 허락이 전제되는데, 왜 새삼스럽게 덧붙여야 하는가? 이유 없다고 본다.제2조 당회 성수 “…장로 1인과 목사의 출석으로”를 “장로 1인과 당회장의 출석으로…” 바꾼 것 옳아 보이고 “…장로 과반수와 당회장의 출석으로” 한 것도 옳아 보인다.제3조 당회장 “당회장은 그 지교회 담임목사가 될 것이나…”에 “교회의 대표자”를 덧붙였는데, 왜 그렇게 세심한지 알 수 없다. 장로는 교인의 대표자(정 제3장 제2조 2) 당회장은 「교회의 대표자」로 세인에게도 널리 알려졌는데, 웬 군더더기냐고 하고 싶다.제10장 노회 제6조 노회의 직무 “어느 지교회에 속한 것을 물론하고, 토지 혹 가옥사건에 대하여 변론이 나면 노회가 처단할 권한이 있다”에서 “처단할 권한”을 「지도할 권한」으로 바꾸었는데, 이것이 민법과 충돌 혹은 시대상황에 맞춘 것인가? 대법원 판례가 교회 재산을 교인들의 합유(合有)라고 하더니, 교인들의 총유(總有) 또는 수와 관계없이 원소속 교단에 속한 교인들의 재산이라도 했고, 분열 당시 교도들의 총유라고도 했고, 지금은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로 재적입교인 3분의 2 이상이면 교회 재산을 가지고 교단을 변경할 수 있다고 했으니, 재적입교인 3분의 2 이상의 재산이 되었는데, 국법의 판단이 이 지경인데, 「총회의 처단권」을 「총회의 지도권」으로 바꾸면 민법과 충돌이 없는가? 교회헌법을 국법에 맞춘다는 생각 자체를 찬성할 수가 없고, 교회사건은 국법도 마땅히 교회헌법에 따라 판결함이 옳지 않겠는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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