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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감사는 행복의 열쇠
    유대인의 인생 교본인 탈무드를 보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배우는 사람이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감사하는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다. 감사하며 사는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훨씬 건강하고 행복하다고 한다. 신체는 감정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감사하면 맥박이 고르게 흐르고 위장의 활동을 도와 소화력을 증진시킬 뿐만 아니라 기분까지 상쾌하게 만들기 때문에 건강하게 된다는 것이다. 반면 불평은 혈액순환을 방해하여 맥박을 급하게 하는 동시에 위장의 운동을 정지시켜 뱃속으로 들어 온 음식의 소화를 거부해 건강에도 어려움을 겪게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소유의 유무와 환경의 조건에 상관없이 감사하는 사람은 행복한 인생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언젠가 세계 54개국 국민들을 대상으로 행복 지수를 조사해 발표했는데 행복지수가 물질적 소유나 환경의 조건에 반비례 하게 나타나 행복의 척도를 생각해 보았다.가장 행복한 나라로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최빈국들이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는 보고였다. 그런데 그런 나라들의 대부분은 인간관계의 끈끈한 정이 삶의 행복의 척도인 반면 선진국의 사람들은 오히려 인간관계에서 비롯한 소외감과 소유의 비교에서 오는 상대적 빈곤감 때문에 불행을 더욱 심하게 느낀다고 한다. 이처럼 행복지수는 객관적인 조건이나 지표 보다는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의 주관적인 생각에서 오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실 행복에는 객관적인 조건이나 지표보다는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의 주관적인 생각에서 차이를 보인다. 사람이 얼마나 행복한 가는 그의 감사의 깊이에 달려 있다. 요즘 오랜 가뭄으로 충청도를 위시해서 전국에 물의 부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땅이 갈라지고 매말라져 가는 현실을 보면서 가슴이 아픔을 느낀다. 생명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하나님의 선물인 생명이 연장되어 오늘의 아침을 맞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눈으로 만물을 볼 수 있고, 내 코로 신선한 공기를 마실 수 있고, 내 귀로 온갖 아름다운 소리를 들을 수 있으며, 내 입으로 마음에 품은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가!지난주에는 경기도 이천에서도 인적이 드문 곳 조금만 비가와도 진창이 되어서 다니기에도 힘든 곳 친척되는 형이 이곳에 들어가게 된 것은 이단집단에 빠졌다가 성경에서 이탈하여 잘못된 교주의 소행을 보고 나오기로 작정 했으나 마땅한 곳을 물색 중에 폐가가 되다 시피한 집을 수리하여 정착하여 사는 곳이다.별 할 일이 없어 벌을 치면서 보람있는 여생을 보내면서, 이 목사 시간 나면 한번 다녀가라고 해서 낯선 길을 찾아가 보니 과연 자연에 파묻혀 자연과 호흡하며 생활하시는 모습이다.어디를 보나 현대화된 가정의 분위기는 찾아보기 힘든 소박하고 단조로운 삶이지만 그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하다. 금년에도 들깨며, 상수리 도토리, 고구마와 호박을 챙겨 주시며 함께 나누어 먹으라고 전갈하신다. 인가와도 동 떨어져 있고 이웃도 멀리 있지만 자연과 가까운 곳 그곳에서 참 삶의 보람을 느끼시는 것이 확연하다.이 목사! 나는 여기에 더 머물러 있고 싶어도 큰 자제가 집을 마련해 놓고 노년에 편히 쉬라고 한다고 한다. 욕심을 다 묻어두고 자연과 벗하며 웃음과 희망을 저 버리지 않은 형의 내외에게 하나님은 노후 에 좋은 삶의 터를 마련해 놓으셨다고 생각되어진다.벌을 키우기는 어려움도 많지만 벌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고 한다.어떤 어려움이 부딪쳐도 단결하는 협동심이나 함께 단체로 협력하여 그들 나름대로 뜻을 이루어 가는 것 등 참으로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고 한다.그 동안 목회를 하면서 얼마나 성도들에게 감사생활을 권했지만 본인은 얼마나 그러한 삶을 살았던가 부끄러운 마음이 서려온다.종종 아프리카 지역에 비가 오지 않아 오래 동안 땅이 갈라진 마른땅을 방송에서 보게 된다. 내 영혼이 감사가 메마르면 영혼의 가뭄이 들면 심령이 갈라지고 메마르지 않기를 기도드린다. 연료 없이 자동차가 달려갈 수 없고 음식을 통해 영양분을 섭취하지 않으면 육체가 지탱할 수 없듯이 믿음 생활도 감사가 메마르면 지탱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감사는 최후의 보루다. 우리의 믿음이 감사가 무너지면 다 무너지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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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2-03
  • 끝나지 않은 전쟁들
    지난달 11월의 둘째 금요일 13일에 프랑스의 수도 파리의 중심부에서 연쇄적인 테러로 인하여 129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되는 참혹한 참변이 발생하였다.이 테러사건의 지휘자인 ‘압텔하미드 아바우드’란 이름의 27세된 청년은 벨기에 브르셀의 명문고를 졸업한 촉망받던 젊은이였다고 한다.그는 사소한 경범죄에 연루되어 수배 받던중 시리아로 건너가 지난해에 IS에 가입한 것으로 알려져 잇다.그가 자신의 페이스북 등에서 밝힌 이번 테러의 명분(?)은 900여년전 당시 프랑스가 주축이 되어 기독교의 성지회복을 위해 이스람권을 공격한 십자군전쟁에 대한 보복적 차원이라고 말하고 있어 또다른 충격을 주고 있는 것이다.천년 가까이 지난 전쟁을 현실적인 문화적 충돌과 연계시켜 참혹한 테러를 자행한 이슬람 청년의 모습에서, 불과 60년전 동족상잔의 6.25전쟁을 경험한 우리 민족에게 주는 강력한 메시지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집권초기부터 연일 호전적 협박성 언행으로 남쪽 국민들을 겁박하던 김정은 정권은 자신이 발표했던 전쟁 발발일시가 무산되자, 요즘은 숨고르기에 들어간 듯 유화정책 등을 제시하며 강온 양면책을 구사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정치적인 사상이나 이념을 넘어서서 김일성 부자를 하나님으로 섬기는 우상종교 집단으로 진화하여 모든 인민들을 ‘아바우드’와 같은 광신도로 세뇌하여 무장시키고 있는 중인 것이다.그들은 틈만 보이면 남쪽 동족들을 향해 갖가지 테러를 자행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들의 왜곡된 신념에 조금이라도 배치되는 자는 같은집안의 고모, 고모부라할지라도 가차없이 숙청하고 참혹하게 처단하는 인간의 잔인성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미국 명문 하버드대학의 전설적 명강의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마이클샌델’이라는 석학은 고대부터 근·현대의 모든 사상과 철학을 총망라하여 인간들의 진정한 정의의 본질을 찾아보려 하고있다. 그러나 한국에서도 백만부이상 팔린 그의 저서에서도 인간의 정의란 시대와 문화적 환경과 처한 상황에 따라 상대적으로 유동적인 ‘이기적인 정의’라는 결론 아닌 결론밖에는 찾지 못하고 있는 현실인 것이다.이와같이 인간들은 애초부터 하나님이 주신 에덴의 평화보다는 사탄의 선악과를 선호하여 할수만 있다면 자신이 하나님이 되어 자신들의 정의를 실현코자 하는 것이다.고금을 막론하고 어느 집단 어느 국가간의 분쟁과 전쟁은 한결같이 자신들의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강력한 욕구의 실현과정에서 발생하였다. 불완전하고 유한한 인간이 자신들의 이기적 가치관을 정의라고 착각하는 순간부터 불신과 분쟁은 시작되고 결국은 파멸로 가는 전쟁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다. 왜곡된 이기적 정의관에 눈이 먼 인간들은 끝없이 전쟁을 만들고 있으며 그렇게 시작된 전쟁은 정의의 본질을 바라볼 수 있는 진실의 눈이 떠지지 않는한 계속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다시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을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요 14:16~17)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말씀 하셨듯이 진리의 영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의 복음을 온세상에 선포하고, 땅끝까지 진리의 복음이 전해 질때 비로소 영원히 계속될 것 같은 인간들의 전쟁도 끝날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원수를 사랑하라”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세상적 이기적 정의로는 도저히 실행할 수도 실행 될수도 없는 너무 먼 이상적 진리로 보일수도 있다. 다만,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스스로 희생양 되심을 본받아 우리들의 이기적 정의를 십자가에 못박고 먼저 희생함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의 복음을 이땅 위에 세운다면 인간들의 끝없는 전쟁도 막을 내리기 시작할 것이다.따라서 하나님의 정의를 이 땅위에 실현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할 한국교회는 먼저 우리자신부터 세상의 이기적 정의로부터 해방되어야 할 것이다.세상의 정의는 실현과정에서 무고한 희생이 따르고 힘없고 소외된 자들은 억울한 일이 생겨도 대의를 위한 희생으로 치부되지만, 하나님 나라의 정의실현은 세상에서 환난 당한 모든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들의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한”(계 21:4) 이타적 십자가의 사랑을 완성하는 일일 것이다.이제 한국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헌신적 희생정신을 본받아 형제끼리도 반목하고 분열하는 이기적 정의에서 벗어나 화합하고 통합하여서 아직도 휴전이란 딱지가 선명한 민족상잔의 6.25전쟁과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정의를 독점한냥 한국교회를 능멸하는 거짓종들과 이단들과의 끝나지 않은 전쟁을 승리로 종식시켜야 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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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2-03
  • 특별기고 / 장로회 정치체제 곡해에서 생긴 행태 ③
    분립지역 경계안 노회작정은 고유한 특권 영역전통승계 노회와 신설노회로 나뉘는 노회분립(승전) 한국장로교회에서 불과 몇 년 동안이라도 대회제를 시행한 교단은 오직 합동측 총회 밖에 없고, 지금은 헌법에만 대회제가 있고 실제로는 법대로 대회제를 시행하지 않고 있다. 개혁측 총회와 합동할 당시 대회제를 시행하기로 하는 조건이 붙었었다는데도 아직은 시행하지 않고 있고 고신측, 기장측, 통합측, 합신측은 헌법에서 대회제 자체가 사라진지 오랬고, 지금은 합동측, 개혁측(개신대학원 계), 합동보수측에 의해서 시행하지 않아도 헌법에는 규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대회제가 있으면 노회를 설립, 분립, 합병, 폐지 등 노회관할 권이 대회에 있으나, 대회제가 없으니 총회의 직무요 총회의 권한인 것은 사실이다.그리고 비단 총회만이 아니고 모든 상회 즉 당회의 상회인 “노회는 각 당회에서 규칙대로 제출하는 헌의와 청원과 상소 및 소원과(고소와) 문의와 위탁판결을 접수하여 처리하며…”(합동: 정 제10장 제6조 2, 합신: 정 제16장 제6조 2, 개혁: 정 제14장 제6조 2, 기장: 정 제10장 제56조 2, 고신: 정 제12장 제93조 2, 통합: 정 제11장 제77조 2)라고 하였으니, 바꾸어 말하면 상회가 처결할 온갖 의안은 원칙적으로 상회 스스로가 만들어 결의하는 것이 아니고 하회에서 합법적으로 올라온 의안만이 상회가 처결할 의안이 된다고 하는 규정이다.그러면 노회를 분립하려고 하면 어떻게 해 왔는지 총회록을 보면 1916년 제5회 총회에서 경상노회와 북평안노회가 경북노회와 경남노회로, 북평안노회와 산서노회로 분립된 것이 첫 번째의 노회 분립이었다.(1916년 제5회 총회록 pp.39~40). 동 총회록에 의하면 “경상노회에서 헌의한 노회분립 사건은 허락하는 것이 좋은 줄로 아오며, 허락하시면 그 명칭은 경북노회 경남노회라 칭하며, 그 노회들을 조직할 임시회장은 경북에 홍승환, 경남에 왕길지 씨로 정하고, 조직할 일자와 처소는 각기 임시회장이 광고케 하오며, 그 재산은 경북에 5분지 3, 경남에 5분지 2로 나누게 함이 가하오며”라고 하였는데, 지역경계가 경상남도, 경상북도가 뚜렷해서였는지 경계에 대한 기록이 없고, 재정을 5분의 3과 5분의 2로 나누게 한 것을 보니, 경상노회 전통은 경북으로 지정된 것 같으나 기록이 없다.그리고 “북평안노회에서 헌의한 노회분립 사건은 허락하는 것이 좋은 줄 아오며, 허락하시면…” 한 후에 산서노회의 지역경계를 자세히 기록하였으며, “조직할 일자와 처소는 임시회장(함기륜)의 지휘대로 하게 하오며, 그 문부와 재산은 원노회에서 주게 함이 가하겠사오며”라 하였으니, 경상노회 분립의 경우에는 없었던 결의가 지역경계요, ‘문부와 재산은 원노회에서 주게 하라 함으로서 북평안노회는 전통승계노회요, 산서노회는 새로 조직되는 제1회 노회가 되게 하고 있다.그리고 1917년 제6회 총회록 pp.16~17에 의하면 “함경노회 분립신청에 대하여는 남북이 분계하여 성진으로 원산까지는 함남이라 칭하고, 경성, 부령, 무산, 회령, 온성, 종성, 경원과 북간도는 함북노회라 칭하되, 다만 해삼위 지방은 함남노회에 부속할 일. 함남노회를 조직할 회장은 이두섭 씨로, 함북노회를 조직할 회장은 부두일 씨로 지정하여 그 노회의 회집할 위치와 일자는 두곳 회장의 지정대로 시행할 일. …재정은 반분하고 문서는 함남노회에 전부할 일”이라고 기록되어 있다.이런 방법으로 총회록을 본다면 그 분량이 방대하여 이제는 노회분립 사건에서 결의한 공통점만 찾아본다면 첫째로 허다한 노회분립 사건은 모두 분립하고자 하는 노회가 청원해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즉 요즈음 어느 교단처럼 총회총대 자격으로 남의 노회를 분립하자는 이른 바 긴급동의에 의한 노회분립의 경우는 전무하다는 사실이다. 둘째는 총회가 노회에서의 청원과 다르게 결정된 일이 있는지는 확인하기가 어려우나 지역경계나 명칭이나 ‘문서는 어느 노회로’라고 결의한 것이 모두 청원에 의한 허락이었고, 총회가 전통승계노회와 신설노회의 구별을 직접 정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1953년 제38회 총회록(p.234)에 의하면 경안노회에서 강동노회를 분립 신설하였는데, 노회명칭, 노회구역, 교회수, 교역자 수, 교인 수, 설립지도위원, 노회소집 책임자, 소집기일을 기록하였으며, 그 다음 해 즉 1954년 제39회 총회록(pp.297~298)에서는 경기노회장 전필순 씨의 노회분립청원건은 하기와 여히 허락하심이 가한 줄 아오며, 1.노회명칭 강원노회 2.지역, 3.목사, 4.교회수, 5.당회수, 6.세례교인수, 7.소집장, 8.설립시일, 9.소집장소로 되었으니, 제1회로 회집할 신설(강원)노회에 대한 결의요 전통승계노회 관계는 일언반구의 결의도 기록도 없다. 그리고 제41회 총회록(1956년 pp47~48)에 의하면 “경남노회장 노진현 씨의 헌의한 마산, 진주 양노회의 분립의 건은 다음과 같이 허락하고, 문부는 경남노회에 비치하고, 재단은 신설노회가 재단은 설립할 때까지 종전대로 할 일이오며”라고 한 후에 분립 신설되는 양노회의 명칭(마산노회, 진주노회)에 이어 지역, 당회수, 교회수, 목사수, 교인수, 소집자, 소집일자, 장소, 지시위원 이렇게 기록되었고, 전통을 승계하는 경남노회는 문부를 비치할 것이라는 기록 외엔 아무런 결의도 기록도 없다. 그리고 1958년 제43회 총화록(p.194)은 “경기노회장 이기혁 씨의 청원한 노회분립에 관한 건은 청원대로 분립함이 가한 줄로 아옵고, 명칭 및 지역은 한강 이북은 경기노회로 하고, 한강 이남을 한남노회라 칭함이 가하온데, 소집장은 강헌집 목사로 함이 좋은 줄 아나이다”라고 하였을 뿐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기록은 “청원대로 분립함이 가한 줄로 아옵고…”이다. 이쯤에서 역대 총회의 노회분립은 첫째가 노회청원에 의한 것이라는 점, 반드시 전통승계노회와 신설노회로 분립한 점, 전통승계노회에는 지역이 작아졌으나 노회권이 그대로 있어 ‘문서를 준다’는 결의 외에 다른 결의가 없다는 사실이다.이렇게 이루어져 온 노회분립이 그 후 어떻게 바뀌어 졌는가? 1975년 제60회 이래로 위와같은 합법적이며 합리적인 노회분립의 전통이 사라지고 망가지기 시작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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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1-20
  • 노벨상을 타는 인격 교육 8
    노벨상을 타는 지혜교육(知慧敎育)의 실제이제 한국의 어머니들의 유아교육과 유대인들의 유아교육을 비교하면서 문제점들을 살펴보고 바른 인간성이 살아나는 교육으로 진행되는 길을 제시하고자 합니다.한국 어머니들의 유아교육한국 어머니들의 유아교육은 전무 하다시피 자기가 타고난 팔자대로 산다고 하면서 방치합니다. 개가 강아지를 키우듯이 동물적으로 그냥 먹을 것 주고 보살펴 주는 것이 한국 어머니들의 유아교육 현실입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조금씩 지식에 눈뜨려고 하면 유아교육 전체를 텔레비전에 맡겨버립니다. 텔레비전을 봐야 말도 빨리 배우고 텔레비전을 봐야 글자도 빨리 익힐 수 있다고 하면서 유아교육 전체를 텔레비전에 맡겨버립니다. 텔레비전을 어느 교육가는 바보상자라고 합니다. 심한 말을 해보면 금쪽같은 우리의 자식들에게 바보교육을 시키는 것과 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자식(子息)들에게 우리는 텔레비전에 교육을 맡겨 놓았습니다.또다른 부류의 어머니들을 소개합니다. 이렇게 텔레비전에 교육을 맡겼다가 식상할 정도가 되면 사교육 프로그램 교육이라는 경쟁교육으로 내몹니다. 그러다보니 나도 모르게 경쟁만 가르치고 있습니다. 경쟁 음악교육, 경쟁 지능교육 등 돐이 채 되지도 않은 아이에게 돈으로 교육을 시킵니다.이런 교육을 받고 자란 아이에게 어릴 때 무엇을 배웠느냐고 물어보면 자기는 아무 것도 모른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어머니들이 자기의 자녀들에게 인성교육을 해 주질 못하고, 학원교육만을 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이렇게 사랑하는 자녀들이 공교육이 아닌 사교육으로 멍들고 있는 데도 이 교육을 받아야 만이 가장 양식있는 교육을 사키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공부는 학원에서 배우고 학교는 하나의 과정에 불과할 뿐입니다. 한국의 교육은 과정보다도 결과만 좋으면 그 중간에 잘못된 것들은 모두 다 용서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유대인들의 어머니 교육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유대인들의 어머니 유아교육유대인들이 2000년 동안 나라 없이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도 자기들의 정체성을 지키며 살아온 배경에는 독특한 민족을 이루는 방식이 있습니다. 유대인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구별되어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선민의식을 누누이 가르칩니다. 유대인들은 선민교육에서 하나님이나 국가가 나를 필요로 한다면 무엇이든지 헌신하는 것을 가르칩니다.우리는 아버지가 한국인이고 어머니가 이방인이면 그 아이는 분명히 한국인(韓國人)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다릅니다. 유대인들은 아버지가 유대인이고 어머니가 이방인이면 그 사람은 혈통적(血統的)으로 유대인이 분명한데도 유대인이 아니고 이방인입니다. 반대로 어머니가 유대인이고 아버지가 이방인이면 그 속에서 나온 자식은 혈통을 따지지 않고 유대인으로 인정하고 자라납니다.나라 없이 민족의 공통점을 찾아주며 세계의 석학들을 쏟아내며 인류문명을 발달시킨 과학자들과 세계를 움직이는 금융, 경제, 기술, 무기, 생명공학, 유전자공학 등 모든 분야에서 불가사의한 일들이 이루어지는 배경에는 바로 어머니의 교육이라는 엄청난 원동력이 있습니다.수천 년의 역사 속에서 끊어질 듯 끊어질 듯 하면서도 끈질기게 유대인의 명맥을 이어온 것은 어머니들의 유아교육에서 기인하고 완성됩니다.한국인들은 제사(祭祀)라는 의식을 통해 가문과 혈통 의식을 통해서 아이들에게 효(孝)를 가르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아이들에게 성경의 인격을 가르칩니다. 성경의 인격교육으로 헌신을 가르치고, 헌신을 통해서 국가를 위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쓰임 받는 소명의식을 가르치고 있습니다.유대인 어머니들의 유아교육은 그들의 역사만큼이나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언제 어디서나 유대인 의식을 강조하여 세계 각국을 유랑(流浪)하면서도 유대 민족의 일체감(一體感)을 갖게 하였습니다. 유대인 어머니들의 유아교육은 국가 통합을 이룩하는 데도 가장 중요한 기능을 담당해오고 있습니다. 유대인 어머니의 교육은 젖먹이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아이가 의식하든 하지 않든 하나님 교육은 실시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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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1-20
  • 이사하는 날
    소로우라는 작가는 미국 메사추세스에서 태어나 20살에 시인 에머슨을 알게 되어 그의 집에 3년 동안 머물면서 ‘초월주의자 운동’에 가담하게 된다. 마침내 26살이 되던 해 소로우는 호반으로 들어가 손수 통나무로 집을 짓고 최소한의 짐만 지니고 2년 6개월 동안 은둔 생활을 하게 된다. 그가 후에 남긴 말이 많지만 그 중에 기억하고 싶은 말이 있다.“내가 숲 속으로 들어간 것은 생을 음미하며 유유하게 살고 싶어서였다. 죽는 순간에 헛된 삶을 살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였다. 인생이란 너무나 소중한 것이기에 참된 삶이 아닌 것은 살고 싶지 않았고 참 삶이 아닌 것은 모두 뿌리치고 최소한의 것만 갖고서 살아 봄으로써 참된 삶의 의미를 찾고 싶었다.”주님은 아름다운 돌과 최상의 재료로 꾸며진 화려한 성전을 보면서 사람들이 감탄해 하자 그 화려한 성전이 어느 날 한꺼번에 무너지고 말 것임을 예언한다.주님은 왜 이러한 말씀을 하셨을까? 그것은 주님이 머무시는 곳은 화려한 궁궐 같은 전이 아니요 바로 우리들의 영혼임을 말씀하시기 위함이 아닐까?예수께서는 아름다운 돌과 화려한 것들로 성전을 꾸미기 보다는 우리들의 영혼을 아름답게 그리고 화려하게 가꾸시는 것을 더 원하신다는 말씀으로 이해한다. 그렇다. 우리들의 몸과 마음이야말로 주의 성령이 머무시는 거룩한 성전이다. 이 혼탁한 시대에 우리는 소로우처럼 정신의 숲속으로 들어가 헛된 욕망과 탐욕보다는 주님께서 머무시는 몸과 마음의 통나무집을 가꾸어 생명이 살아 숨 쉬는 아름다운 공간을 마련하기를 원하신다.생각해 보면 한동안 머물던 서울을 떠나 천안으로 이사를 하게 되는 것은 복잡한 서울을 떠나 새로운 자연의 의미를 체험하라 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들려오는 듯하다. 지난주 이사를 위해 책을 정리하다 보니 생각보다 많은 양임을 발견하고 본인도 놀랄 정도였다. 일부는 00대학교에 보내고 나머지는 가지고 가기로 했다. 책을 모으기에 사모와 가족이 느꼈을 불편과 경제적인 어려움을 안겨준 점은 미안함이 금할 수 없으나 많이 이해해준 아내와 가족에 감사를 드린다.책을 정리 하며 공상에 젖어본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내 놓으셨나?당신의 모든 것을 내 놓으셨다. 생각해 보면 내가 갖고 있는 모든 것들이 누구로 부터 받았는가? 주님께로 부터 받은 것이 아닌가? 이사할 집에 공간이 넉넉지 못해 책을 정리해야 하는 아픔을 경험 하면서 이런 적은 것을 가지고도 내놓기가 어려운 일이라면 주님은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 주셨다. 언제 가는 주님이 내어 놓으라고 하시면 다 내어 놓아야 할 것들이다. 그것들은 영원히 소유 하고 살 수 있는 것들이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나에게 허락하신 시간도, 재능도, 물질도 결국 나 자신만을 위해 쓰라고 주신 것은 아닐 것이다. 누구든지 자신만을 위해 살려는 사람은 죽을 것이고 주님을 위해 살려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나 자신을 주님께 내놓는 것 뿐 아니라 내가 갖고 있는 것들을 나눔으로써 이웃 사랑을 실천 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가 아니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친절, 관심, 용서, 나눔 등이 우리 자신들이 나눌 수 있는 방법들이다. 이웃과의 관계를 잘 맺는 것, 사랑을 실천하는 것, 마음에 품고 있는 것이 있다면 용서로써 깨끗이 지워버리자. 하나님께서는 그 어떤 잘못도 남김없이 모두 다 용서해 주셨다. 우리도 그렇게 용서해야 되지 않겠는가? 그것이 진정 내 놓는 삶이 아닐까? 이러한 생각 속에 한 길만 걸어왔고 그동안 몇 교회를 섬기면서 교회의 터를 장만하고 떠나온 일이며 교회를 건축한 일에 스스로 자위도 해보지만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부끄러움이 앞선다.이제 책을 정리한 분량 이상의 것을 정리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이제 세속의 때를 보혈의 샘에서 씻어내자. 어지러워진 심신을 씻어버리자. 부질없는 삶은 십자가에 못 박고 번민의 골진 이랑을 닦아내고 싶구나. 주여! 온갖 잡것들로 채워진 마음을 깨끗하게 수리하고 주님이 오실 마음의 공간을 마련하게 하옵소서. 이제부터 더욱 보람 있는 있는 삶의 둥지를 꾸며 가리라 다짐 하며 이사 준비하는 일이 힘들지만 희망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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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1-12
  • 노벨상을 타는 인격 교육 -7
    교회교육의 위기일주일 중에서 6일 간은 세상교육에 투자를 하고, 교회교육은 딱 한 시간으로 어떻게 제대로 가르칠 수가 있겠습니까? 주일예배 한 시간으로 온전한 주일성수는 이미 오래 전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교회를 다니는 학생들도 주일학교 예배 대신에 학원가고 공부하는 것들이 아주 자연스럽습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하는 모든 것들이 모두 장년 위주로 시간과 공간을 투자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청소년들에게 투자하는 시간과 공간이 너무 부족한데 교회교육이 어찌 효과가 있을 수 있습니까?.그러나 교육만큼 커다란 열매는 없습니다. 지금의 청소년들은 그 영혼이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져 있습니다. 걷잡을 수 없이 타락되어 있고 강팍합니다. 저들의 마음밭은 딱딱한 돌밭이 되어 복음의 씨를 뿌려도 싹이 나지 않을 만큼 신앙의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가 과감히 주일학교 교육에 일대 개혁을 해야 합니다.교회교육이 흥미위주의 교육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교회교육이 탤런트나, 연예인들 이나, 인기스포츠 선수를 초빙하여 아이들의 관심을 끌려고 하는 일회성 교육에서 벗어나야 합니다.예배 참석의 시간을 늘릴 수 있는 효(孝)의 교육 프로그램을 진지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예배참석의 시간을 늘릴 수 있는 극기훈련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3~5일간 몰입하는 교육훈련이 필요합니다. 병원과 불우이웃을 돌아보는 헌신과 봉사의 교육을 접목하여 사랑의 실천교육을 집중적으로 교육하는 것이 필요합니다.방학 때에 5박6일의 특별참여 프로그램을 통하여 예배참석을 유도하는 예절교육의 시간들을 많이 개발해야 합니다. 교회교육은 어릴 때는 가정에서부터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교육을 밑바탕에 심고, 교회와 학교에서도 믿음의 교육을 바탕으로 인간성이 먼저 확보되고 난 후에 세상의 인문과 자연의 경험교육을 가르치면 위대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될 것입니다.노벨상을 타는 지혜교육(知慧敎育)의 실제인간성 회복 유아교육(幼兒敎育)사람은 하얀 도화지와 같다고 합니다. 푸른 물감을 그리면 그 푸른 색깔이 평생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 위에 아무리 빨간색을 칠해도 그 근본이 되는 푸른색 같은 평생(平生)을 남기게 됩니다. 이와 같이 하얀 도화지 위에 빨간 물감을 칠하면 그 붉은 사상(思想)은 평생을 남아있게 됩니다.마찬가지입니다. 노란 색깔, 검은 색깔, 온갖 색깔이 칠해져 있는 것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원래의 하얀 색깔, 순수(純粹)하고 착한 색깔은 어느새 이세상의 색깔에 칠해져 있는 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유대인들은 새하얀 도화지 위에 하나님을 칠하고 있는데, 우리는 교육을 감당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조차도 아이들에게 갈등(葛藤)을 칠하고 있지는 않는지 다시 한번 재고해 봅시다. 하얀 바탕 위에 어떤 색깔을 칠하느냐에 따라 인생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유대인의 유아교육은 성경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성경의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지혜(知慧)를 가르칩니다.교육의 특징이 하나님을 알게 하여 선(善) 과 악(惡)의 분별을 알게 합니다. 유대인들은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의식적으로 가르칩니다.우리는 나도 모르게 금쪽 같은 귀한 아이들에게 경쟁(競爭)의 칠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유아기 때의 교육을 우리는 너무나도 간과해 버리고 애들은 자기 타고 난 팔자대로 사는 것이라는 지나친 낙관주의로 아기가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결정된 윤회교육(輪回敎育)의 자락에 버려져 있다 보니 일찍부터 포기하는 섭성에 젖어버렸습니다.이제 한국의 유아교육을 살펴보겠습니다. 유아교육은 어머니의 품 속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성경을 바탕으로 우리 자신도 배우면서 아이들에게 자연히 하나님의 지혜를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중요한 인생의 시작인 유아교육을 하나도 해 주질 못하고 있습니다.세계의 모든 지식과 문화, 교육, 화학, 생명공학, 물리, 무기, 신지식, 신기술, 금융 등 학문의 모든 것을 움직이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유대인들입니다. 유대인들은 2000년 간이나 나라 없이 민족끼리 뭉쳐서 같이 살지도 못했습니다. 이러한 유대인들이 이렇게 성공한 이유는 어머니들의 유아교육에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어머니들은 세상 경험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 가르칩니다. 아이들에게 하나님은 절대교육입니다. 이 교육은 아이에게 평생에 뇌리에 남게 되는 평생교육의 밑바탕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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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1-12
  • 장로회 정치체제 곡해에서 생긴 행태-2
    치리회의 기소권 행사는 소속회원에게 국한되고상회가 기소했어도 장로는 당회, 목사는 노회 재판 (승전) 그런데 장로회정치 체제 하에 있으면서도 당회에서는 노회가 높은 것만 같고, 노회에서는 총회가 높은 것만 같아, 노회는 지교회 당회의 고유한 특권인 교인관계 통치권을 무시하고 소원도 없고 상소도 없었는데, 동의와 재청에 의한 조사처리위원회를 구성하고, 그 위원회에 재판권까지 부여하는 결의를 하고, 그 조사처리위원회는 목사 배척심을 가진 교인이나 장로나 집사를 불러 조사한다며 배척심에 힘을 실어주거나 맞장구를 친다. 잘못 판단인지는 모르나 어느 지교회를 시무하는 목사든지 100% 지지를 받는 목사가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제아무리 훌륭한 목회자라고 해도 목회하는 과정 속에 ‘그렇게 하지 않았어야 할 것을 했구나’ 하고 후회스러운 실책이 전혀 없는 목회자가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불행스럽게도 ‘털어서 먼지 안 날 놈 없다’는 속담에서 그 속담은 성직자인 내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주 앞에서 호언장담할 수 있는 자가 과연 몇%나 되겠는가? 너는 해당될 일이 과연 없겠는가?교회 안에 허물도 있고, 흠도 있고 심한 경우는 한 대 때려서 바로 잡아야 할 일이 있을지라도 용서하고 관용하고 오래 참아 밖으로 표출되지 아니하는 기간 동안, 이 교회는 평온한 교회, 은혜로운 교회로 볼 수 있다고 한다면 이런 교회에 노회가 조사처리위원회를 구성하여 조사한다는 것은 평온한 교회, 은혜로운 교회를 뒤흔들어 용서하고 참고 있는 허물을 들추어내어 분쟁을 일으키는 결과가 되지 않겠는가? 이런 악행이 노회는 높고 지교회 당회는 낮다고 여기는, 즉 치리회의 동등도 고유한 특권도 헤아릴 줄 모르는 무식한 실세들의 정치라 하겠은즉 곧 행패정치요 장로회정치가 아니란 말이다. 그리고 행패정치라고 한 것은 평온한 교회에서 목사 배척세력에 힘을 실어주고 맞장구를 쳐서 교회의 평온을 망치는, 권리의 원인 없이 권리를 행사하는 그런 정치이니, 이것이 행패정치가 아니면 무슨 정치인가?그러나 행패정치는 그 정도에 머물지 아니한다. 노회에서 조사처리위원회에 재판권까지 주었다면서 재판하겠다고 목사 지지세력을 소환하여 닦달을 한다. 조사처리위원회에 재판권까지 맡겼다면 조사처리위원회가 재판국으로 변경하는 변격권(變格權)이 있으니 재판국으로 변경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재판국은 재판할 대상이 없는데, 도대체 누구 마음대로 사람을 불러 신문한다며 닦달을 하는가?노회가 조사처리위원회에 재판권까지 위탁하려고 하면 위탁할 수는 있다. 그러나 교인의 관할권은 지교회 당회가 가지는 고유한 특권인데, 치리회의 기소권은 소속회원에 국한되는 것이니, 교인은 소속 당회가 기소할 수 있고, 다른 당회는 물론 상회인 노회도 총회도 기소하지 못한다.(다만 장로가 노회총대가 되었을 경우에는 노회서기가 총대천서를 호명한 후부터는 노회원이니, 이런 경우에는 노회도 그 노회원(즉 하회에서 올라온 총대장로를 가리킨다)을 기소할 수는 있어도(권 제2장 제7조 고신: 권 제2장 제10조 1, 기장: 권 제2장 제9조, 합동보수: 권 제2장 제7조, 개혁: 권 제2장 제8조 2. 합신: 권 제2장 제7조) 노회의 총대장로가 아닌 장로를 노회가 어떻게 기소하느냐? 또 총회총대가 된 목사나 장로도 총회서기가 전서를 호명한 후부터는 총회원이니 총회가 그 목사, 장로를 기소할 수는 있거니와 총회총대가 아닌 목사, 장로를 총회가 어떻게 기소할 수 있겠는가? 또 총대가 되어 장로나 목사가 총회 혹은 노회에서 기소할 수는 있으려니와, 교인의 재판관할권은 오직 소속 지교회의 당회요 목사의 재판관할권은 오직 소속노회이니(합동: 권 제4장 제19조, 개혁: 제3장 제14조, 합동보수: 권 제4장 제19조, 고신: 권 제3장 제17조, 통합: 권 제2장 제7조 2, 기장: 권 제1장 제4조), 대등한 다른 노회는 물론, 상회인 총회에도 이 권한이 없다. 그러므로 장로가 노회원이나 총회원으로서의 범행에 대하여 노회나 총회가 기소할 수는 있으나, 재판은 그 장로가 속한 지교회 당회가 행해야 하고 기소한 노회나 총회는 불가불 그 장로가 속한 당회에서 재판을 받는 일에 원고 구실을 하는 것 뿐이라고 하는 말이다. 총회총대가 된 목사가 총회회원으로서의 범행에 대해서도 역시 총회가 기소할 수는 있어도 재판은 그 목사의 소속노회로 가서 행할 수 밖에 없다는 말이다.그런데 노회에서 조사처리하기로 하고 그 위원회에 재판권까지 맡겼다고 해도, 노회원도 총회원도 아닌 교인을 노회재판국이나 총회재판국이 어떻게 재판하겠다며 오라! 가라! 하는가? 이러고서도 행패정치 깡패정치가 아니라고 하겠는가? 높은 “어른들이여! 고유한 특권이 무엇입니까? 상회의 권위나 결의로도 박탈하지 못하는 오직 그 회에서만 가지는 권한이어서 고유한 특권이라고 불리는데, 이것을 상회라고 박탈할 수 있다면 그것은 상회지상주의이지 어떻게 장로회정치인가? 그것은 독재정치이지 어떻게 주권이 교인에게 있는 민주적 정치인 장로회정치인가?그리고 이런 일은 어느 노회든지 아무개든지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당을 지어 노회의 실권을 장악한 세력화 된 실세가, 그 실권자만 행할 수가 있다고 본다. 이런 노회에서 가령 어떤 목사를 찍어 내겠다고 생각하고 위와같은 방법을 취했을 경우 거의 100% 성공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이런 노회에서 실세화한 세력이, 행하는 일에 반기를 들고 항거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반기를 들었다가는 그도 그 실세에게 찍혀 곤욕을 치르게 되겠으니 말이다. 이제 전국노회 중 세력화된 실세들과 실권자들에게 묻고 싶다. 목적대로 성공해서(즉 평온한 교회에서 목사를 찍어내서) 무엇이 좋은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는 주님의 말씀을 믿는다면 마지막 날에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는 판단을 받게 될 터인데, 그래도 실세노릇, 실권자 노릇을 계속해야 하겠는가? 세력화된 실세들과 그 실권자들이 돌이키지 않는 한, 또한 불의와 불법에 벌벌 떨기만 하던 자들이 주님의 능력을 힘입어 저희와 싸워 승리하는 날이 오기 전까지는 이런 악행이 계속 될 것을 생각하니 안타깝다. 한심스럽다는 말로 이 글을 마쳐야 하는가?(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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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1-12
  • 장로회 정치체제 곡해에서 생긴 행태 -1
    임원·임사부, 실행위, 조사처리 전권위, 총회재판국 등은 치리회 아니므로 직접치리권 행사 모두 불법 무효 먼저 1922년 판 헌법 정 제8장 제1조를 보면 “…사리에 적합한 것과 성경교훈과 사도시대 교회의 행사에 의하여 추관(推觀 미루어 보다) 한즉, 교회를 치리하는 권은 개인에게 있지 않고 당회 노회 총회와 같은 치리회에 있나니라”(기장: 정 제8장 제41조, 합동: 정 제8장 제1조, 개혁: 정 제12장 제1조, 보수: 정 제8장 제1조)고 하였고, 치리권은 치리회 회의에 의해서만 행사할 수 있다 함이니, 장로회정치란 바로 치리회 회의정치 체제요, 따라서 회의결의에 의하지 아니하고 장로 개인이나 목사 개인이 치리권을 행사한다면 명백한 불법이요, 또는 장로의 무리가 제 아무리 수십, 수백이 모였다고 해도 그 모임이 치리회가 아닌 이상 똑같은 불법이요, 목사의 무리들의 경우라고 해도 치리회가 아닌 이상 치리권을 행사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면 ‘임원·임사부’ ‘실행위’ ‘전권위’ ‘총회재판국’이 치리회인가? 아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직접 행사한 치리권은 모두 불법이다.그리고 같은 헌법 제2조는 “교회 치리하는 각 회는 등급은 있으나, 각회 회원은 장로 뿐인 고로 각회가 다 노회적 성질이 있느니라. 이미 동일한 자격으로 조직한 것인 고로 자연히 동일한 권리와 세력이 있으나, 그 치리의 분간(分揀)은 교회헌법에 정한 바 있느니라(고신: 정 제10장 제76조, 기장: 정 제8장 제42조, 통합: 정 제9장 제61조, 합동: 정 제8장 제2조, 개혁: 정 제12장 제3조, 합동보수:정 제8장 제2조). 그리고 위 조문에서 “장로 뿐인 고로”는 가르치는 일과 다스리는 일을 겸한 장로인 목사와 다스리는 장로와의 뜻이고, ‘분간(分揀)’이란 사물의 선악, 대소, 경중, 시비 등을 가려서 헤아린다는 뜻인데, 1930년 판 이래로 이를 ‘고유한 특권’으로 바꾸어 규정하고 있다. 즉 각 치리회가 법의 규정대로 치리회의 결의에 의해 치리권을 행사함이 정당하지만 각 치리회 회원들은 목사도 장로도 사람이니, 인간적인 제한과 약점으로 말미암는 오실(誤失)을 부인할 수 없는 사람들이므로 당회의 잘못은 노회가 바로잡고, 노회의 잘못은 대회나 총회(헌법과 도리계쟁 사건 외에는 대회가 종심이 되니)가 바로잡게 하는 3심제도를 원용하게 되니, 높고 낮은 계급에 의한 조직, 즉 위계(位階)적인 조직을 하게 된다 함이니, 당회 위에 노회가 있고, 노회 위에 대회 혹은 총회가 있지만, 그래서 당회가 말단 하회요, 총회가 최고회이지만, 모든 치리회의 구성요원은 당회만 목사, 장로로 구성될 뿐 아니라 노회도 목사와 장로요, 대회도 총회도 목사와 장로 뿐인데, 이 목사와 장로는 당회의 목사 장로나 노회의 목사 장로나 대회나 총회의 목사 장로가 그 권한이 다 동일하며, 동등하니, 당회도 목사 장로의 권한 그대로요, 노회도 목사와 장로의 권한 그대로요, 총회도 목사의 권한과 장로의 권한 그대로이니, 각급 치리회는 위계적인 조직이면서도, 그래서 관할 범위가 당회는 오직 한 지교회요, 노회는 여러 지교회들의 조직체이니 관할 범위가 당회보다는 더 넓으며, 대회는 여러 노회들의 조직체이니 관할 범위가 노회보다 더 넓으며, 총회는 전국적인 조직이니 더 말할 필요가 없지만, 즉 관할범위가 넓고 좁은 차이는 있지만, 또 회원된 목사, 장로의 수도 당회가 제일 적고, 노회가 당회보다 많고, 혹은 대회나 총회가 제일 많은 차이는 있지만, 각급 치리회가 다 동등한 목사 장로를 구성요원으로 하고 있으니 그 권한에 있어서도 당회가 낮은 것도 아니고 노회, 대회, 총회가 높은 것도 아니고 다 동등하다고 하는 말이다.그리고 모든 치리회가 치리회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치리회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분간(分揀) 즉, 고유한 특권으로 나누어 놓았으니, 지교회의 교인관계 치리권은 오직 그 당회에만 있고, 다른 당회는 물론, 노회에도 총회에도 이 권한이 없으며, 설립, 분립, 합병, 폐지 등 지교회관계 치리권과 목사관계 치리권은 그 노회에만 있고, 다른 노회는 물론 대회나 총회에도 이 권한이 없으며, 설립, 분립, 합병, 폐지 등 노회관계 통치권은 오직 그 대회에만 있고, 다른 대회는 물론, 총회에도 이 권한이 없으며, 총회는 도리관계 및 헌법관계 고유한 특권을 가지게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미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당회의 잘못처결에 대하여는 노회에 소원하거나 상소하여 노회가 바로잡으며, 노회의 잘못처결은 (대회제는 시행하지 않으니) 총회에 소원하거나 상소(교회헌법은 상소와 상고의 구별이 별로 없이 상소라고 하고 있다)하여 총회가 바로잡게 되니, 결국 상회인 총회도 소원이나 상소에 의하지 아니하고서는 교인과 지교회와 목사에 대한 원치리권(직접치리권)이 없으니 아무런 처결도 할 권한이 없게 된다.그리고 1922년 판의 위의 법조문은 이어서 ‘그런즉 각 치리회가 각자 자존(自存)하는 회가 되는 것이 아니요, 서로 연락(聯絡)되는 것이니 어느 회를 불문하고 무슨 일을 처결하든지 그 결정은 법대로 대표된 치리회로 말미암아 행할 것이니, 전교회(全敎會)의 결정이 되느니라’(고신: 정 제10장 제76조 4. 기장: 정 제8장 제42조, 합동: 정 제8장 제2조 2. 개혁: 정 제12장 제3조 2. 합동보수: 정 제8장 제2조2). 즉 전체 교회가 예수님의 한 몸으로 연결되었으니 A교회가 고유한 특권에 따르는 결정을 하였으면 그것이 A교회는 물론 전국교회에 효력이 미치는 결정이 되며, A노회가 고유한 특권에 따르는 결정을 하였으면 그것이 A교회는 물론 전국교회에 효력이 미치는 결의, 즉 전국 모든 당회들의 결정이요 전국 모든 노회원들의 결정이요 총회의 결정과 똑같은 효력을 가지게 된다는 말이다.그러므로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게 된다. 하회인 지교회의 당회는 교인관계 통치권을, 노회는 지교회관계와 목사관계 통치권을 행사하게 하려는 치리회이다. 그리고 총회는(고유한 특권에 의한 직무는 물론)하회의 오실을 바로잡게 하기 위해 세워진 치리회라고 하는 말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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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0-30
  • 노벨상을 타는 인격 교육-6
    교회교육의 위기공교육(公敎育)의 위기, 국가교육(國家敎育)의 위기에 이르도록 그 동안 교회의 교육(敎育)은 완전히 포기한 상태요 교회의 교육은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한 세대 이전에는 교회가 이 나라의 공교육을 리드했습니다. 우리의 문학작품에 나오는 상록수 같은 소설의 주인공들을 보세요. 이 나라의 기초를 닦으신 분들의 근본을 보세요. 모두 기독교교육을 실천했던 분들입니다.모두 교회교육을 통한 실천이었고, 교회교육을 통한 근본교육이요, 교회교육을 통한 사랑교육이었습니다.그러나 현재의 교회교육을 들여다보세요. 주일학교 유아교육, 주일학교 초등 전반기 교육, 주일학교 초등 후반기 교육, 교회학교 중등교육, 교회학교 고등교육, 교회학교 대학교육. 이렇게 잘 짜여진 교육프로그램은 있으나 모두 사문화 되고 교육은 어디에도 없습니다.흔히 이렇게 잘 짜여진 교육 프로그램이 있는 교회를 우수한 교회라고 합니다. 그러나 교회교육은 흔적만 있을 뿐이지, 사회교육(社會敎育)으로, 공교육(公敎育)으로, 학교교육(學校敎育)으로, 교육의 인적자원들을 도무 빼앗기고 교회교육은 없습니다.교회를 잘 다니고 믿음의 교육으로 무장한 분들도 자녀가 유아 때는 교회의 유아원(幼兒園)을 다니며 예수님이 좋아요 하늘보다 바다보다 이 세상 모든 것보다 좋아요 하고 믿음의 교육을 잘 받습니다. 그러나 유아원을 졸업한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에는 학교교육에 더 힘을 쏟고 교회교육은 외면합니다.왜 그럴까요? 교회교육이 학교교육을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믿음의 가족이다 보니 믿음의 교육으로 주일학교 초등교육의 과정을 마치고, 이제 중고등부로 올라갑니다. 중고등부의 교회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다가 고3만 되면 교회학교에 아예 출석을 안합니다. 고3 입학시험 때문이라고 합니다. 대학입학 때문에 교회에 나오지 않아도 모두 눈감아 줍니다. 심지어 교회의 목사님들의 자녀조차도 주일날 교회 나오지 말고 집에서 공부하라고 하는 목사님들도 있습니다.그리고 대학교에 입학하면 교회에 얼굴을 비치지만, 대학입학시험에 떨어지면 아예 교회조차도 발을 끊어버리는 현실입니다. 이렇게 10년 후가 되면 우리의 교회를 이끌어가고 교회를 섬겨야 하는 인적자원까지 부족할 것은 명약관화 합니다.세계기독교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적을 이루어낸 한국교회가 이렇게 무참하게 허약한 문제들이 발생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외국에서 선교사역만 하다고 돌아온 저로서는 가슴에 대못이 박히는 마음의 답답함을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습니다. 언제부터 이 나라의 교회가 이렇게 교육에 대하여 힘을 잃었습니까?1) 교회교육의 부재입니다.교회는 교회다워야 합니다. 지금의 교회는 사회보다 못한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진실된 하나님의 말씀을 실제생활에 접목해서 가르쳐야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세상 인본주의 교육가의 이론을 아무런 검증 없이 교회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문제입니다. 각 교회마다 유치원 과정에서부터 경쟁교육을 무슨 금과옥조처럼 가르치고 있습니다.경쟁교육은 반기독교적인 사고의 교육이론입니다. 교회말살의 교육이론입니다. 교육의 철학이 최고라고 가르치는 교육이론입니다.교회는 하나님의 원리대로 성경을 제쳐놓고 어떠한 프로그램이든지 온전한 교육을 성공한 일이 한 번도 없습니다. 성경말씀을 제치고 다른 방법을 동원하여 성공한 예는 한 번도 없었습니다. 교회교육은 진실한 사람을 만들어 나가는 현재 진행형입니다.하나님의 성경말씀을 진리로 삼아 현실에 맞게 제대로 적용하여 가르칠 때, 인간성이 살아나고 인격이 갖추어지는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2) 예배참석의 부재현상입니다.아이들에게 일주일 중에서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학교교육뿐만 아니라 학원교육, 특별교육, 별별 교육을 다 가르칩니다. 그리고 주일날 오전에 딱 한 시간 예배 참석하여 하나님의 말씀은 채 5분도 듣지 못합니다. 주일날 하루 종일 교육받는 것도 아니요, 한 시간 예배에 참석하여 온전한 기독교교육이 된다는 것은 무리입니다.노벨상을 타는 인격 교육 �교회교육의 위기공교육(公敎育)의 위기, 국가교육(國家敎育)의 위기에 이르도록 그 동안 교회의 교육(敎育)은 완전히 포기한 상태요 교회의 교육은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한 세대 이전에는 교회가 이 나라의 공교육을 리드했습니다. 우리의 문학작품에 나오는 상록수 같은 소설의 주인공들을 보세요. 이 나라의 기초를 닦으신 분들의 근본을 보세요. 모두 기독교교육을 실천했던 분들입니다.모두 교회교육을 통한 실천이었고, 교회교육을 통한 근본교육이요, 교회교육을 통한 사랑교육이었습니다.그러나 현재의 교회교육을 들여다보세요. 주일학교 유아교육, 주일학교 초등 전반기 교육, 주일학교 초등 후반기 교육, 교회학교 중등교육, 교회학교 고등교육, 교회학교 대학교육. 이렇게 잘 짜여진 교육프로그램은 있으나 모두 사문화 되고 교육은 어디에도 없습니다.흔히 이렇게 잘 짜여진 교육 프로그램이 있는 교회를 우수한 교회라고 합니다. 그러나 교회교육은 흔적만 있을 뿐이지, 사회교육(社會敎育)으로, 공교육(公敎育)으로, 학교교육(學校敎育)으로, 교육의 인적자원들을 도무 빼앗기고 교회교육은 없습니다.교회를 잘 다니고 믿음의 교육으로 무장한 분들도 자녀가 유아 때는 교회의 유아원(幼兒園)을 다니며 예수님이 좋아요 하늘보다 바다보다 이 세상 모든 것보다 좋아요 하고 믿음의 교육을 잘 받습니다. 그러나 유아원을 졸업한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에는 학교교육에 더 힘을 쏟고 교회교육은 외면합니다.왜 그럴까요? 교회교육이 학교교육을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믿음의 가족이다 보니 믿음의 교육으로 주일학교 초등교육의 과정을 마치고, 이제 중고등부로 올라갑니다. 중고등부의 교회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다가 고3만 되면 교회학교에 아예 출석을 안합니다. 고3 입학시험 때문이라고 합니다. 대학입학 때문에 교회에 나오지 않아도 모두 눈감아 줍니다. 심지어 교회의 목사님들의 자녀조차도 주일날 교회 나오지 말고 집에서 공부하라고 하는 목사님들도 있습니다.그리고 대학교에 입학하면 교회에 얼굴을 비치지만, 대학입학시험에 떨어지면 아예 교회조차도 발을 끊어버리는 현실입니다. 이렇게 10년 후가 되면 우리의 교회를 이끌어가고 교회를 섬겨야 하는 인적자원까지 부족할 것은 명약관화 합니다.세계기독교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적을 이루어낸 한국교회가 이렇게 무참하게 허약한 문제들이 발생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외국에서 선교사역만 하다고 돌아온 저로서는 가슴에 대못이 박히는 마음의 답답함을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습니다. 언제부터 이 나라의 교회가 이렇게 교육에 대하여 힘을 잃었습니까?1) 교회교육의 부재입니다.교회는 교회다워야 합니다. 지금의 교회는 사회보다 못한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진실된 하나님의 말씀을 실제생활에 접목해서 가르쳐야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세상 인본주의 교육가의 이론을 아무런 검증 없이 교회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문제입니다. 각 교회마다 유치원 과정에서부터 경쟁교육을 무슨 금과옥조처럼 가르치고 있습니다.경쟁교육은 반기독교적인 사고의 교육이론입니다. 교회말살의 교육이론입니다. 교육의 철학이 최고라고 가르치는 교육이론입니다.교회는 하나님의 원리대로 성경을 제쳐놓고 어떠한 프로그램이든지 온전한 교육을 성공한 일이 한 번도 없습니다. 성경말씀을 제치고 다른 방법을 동원하여 성공한 예는 한 번도 없었습니다. 교회교육은 진실한 사람을 만들어 나가는 현재 진행형입니다.하나님의 성경말씀을 진리로 삼아 현실에 맞게 제대로 적용하여 가르칠 때, 인간성이 살아나고 인격이 갖추어지는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2) 예배참석의 부재현상입니다.아이들에게 일주일 중에서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학교교육뿐만 아니라 학원교육, 특별교육, 별별 교육을 다 가르칩니다. 그리고 주일날 오전에 딱 한 시간 예배 참석하여 하나님의 말씀은 채 5분도 듣지 못합니다. 주일날 하루 종일 교육받는 것도 아니요, 한 시간 예배에 참석하여 온전한 기독교교육이 된다는 것은 무리입니다.노벨상을 타는 인격 교육 �교회교육의 위기공교육(公敎育)의 위기, 국가교육(國家敎育)의 위기에 이르도록 그 동안 교회의 교육(敎育)은 완전히 포기한 상태요 교회의 교육은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한 세대 이전에는 교회가 이 나라의 공교육을 리드했습니다. 우리의 문학작품에 나오는 상록수 같은 소설의 주인공들을 보세요. 이 나라의 기초를 닦으신 분들의 근본을 보세요. 모두 기독교교육을 실천했던 분들입니다.모두 교회교육을 통한 실천이었고, 교회교육을 통한 근본교육이요, 교회교육을 통한 사랑교육이었습니다.그러나 현재의 교회교육을 들여다보세요. 주일학교 유아교육, 주일학교 초등 전반기 교육, 주일학교 초등 후반기 교육, 교회학교 중등교육, 교회학교 고등교육, 교회학교 대학교육. 이렇게 잘 짜여진 교육프로그램은 있으나 모두 사문화 되고 교육은 어디에도 없습니다.흔히 이렇게 잘 짜여진 교육 프로그램이 있는 교회를 우수한 교회라고 합니다. 그러나 교회교육은 흔적만 있을 뿐이지, 사회교육(社會敎育)으로, 공교육(公敎育)으로, 학교교육(學校敎育)으로, 교육의 인적자원들을 도무 빼앗기고 교회교육은 없습니다.교회를 잘 다니고 믿음의 교육으로 무장한 분들도 자녀가 유아 때는 교회의 유아원(幼兒園)을 다니며 예수님이 좋아요 하늘보다 바다보다 이 세상 모든 것보다 좋아요 하고 믿음의 교육을 잘 받습니다. 그러나 유아원을 졸업한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에는 학교교육에 더 힘을 쏟고 교회교육은 외면합니다.왜 그럴까요? 교회교육이 학교교육을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믿음의 가족이다 보니 믿음의 교육으로 주일학교 초등교육의 과정을 마치고, 이제 중고등부로 올라갑니다. 중고등부의 교회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다가 고3만 되면 교회학교에 아예 출석을 안합니다. 고3 입학시험 때문이라고 합니다. 대학입학 때문에 교회에 나오지 않아도 모두 눈감아 줍니다. 심지어 교회의 목사님들의 자녀조차도 주일날 교회 나오지 말고 집에서 공부하라고 하는 목사님들도 있습니다.그리고 대학교에 입학하면 교회에 얼굴을 비치지만, 대학입학시험에 떨어지면 아예 교회조차도 발을 끊어버리는 현실입니다. 이렇게 10년 후가 되면 우리의 교회를 이끌어가고 교회를 섬겨야 하는 인적자원까지 부족할 것은 명약관화 합니다.세계기독교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적을 이루어낸 한국교회가 이렇게 무참하게 허약한 문제들이 발생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외국에서 선교사역만 하다고 돌아온 저로서는 가슴에 대못이 박히는 마음의 답답함을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습니다. 언제부터 이 나라의 교회가 이렇게 교육에 대하여 힘을 잃었습니까?1) 교회교육의 부재입니다.교회는 교회다워야 합니다. 지금의 교회는 사회보다 못한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진실된 하나님의 말씀을 실제생활에 접목해서 가르쳐야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세상 인본주의 교육가의 이론을 아무런 검증 없이 교회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문제입니다. 각 교회마다 유치원 과정에서부터 경쟁교육을 무슨 금과옥조처럼 가르치고 있습니다.경쟁교육은 반기독교적인 사고의 교육이론입니다. 교회말살의 교육이론입니다. 교육의 철학이 최고라고 가르치는 교육이론입니다.교회는 하나님의 원리대로 성경을 제쳐놓고 어떠한 프로그램이든지 온전한 교육을 성공한 일이 한 번도 없습니다. 성경말씀을 제치고 다른 방법을 동원하여 성공한 예는 한 번도 없었습니다. 교회교육은 진실한 사람을 만들어 나가는 현재 진행형입니다.하나님의 성경말씀을 진리로 삼아 현실에 맞게 제대로 적용하여 가르칠 때, 인간성이 살아나고 인격이 갖추어지는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2) 예배참석의 부재현상입니다.아이들에게 일주일 중에서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학교교육뿐만 아니라 학원교육, 특별교육, 별별 교육을 다 가르칩니다. 그리고 주일날 오전에 딱 한 시간 예배 참석하여 하나님의 말씀은 채 5분도 듣지 못합니다. 주일날 하루 종일 교육받는 것도 아니요, 한 시간 예배에 참석하여 온전한 기독교교육이 된다는 것은 무리입니다. 프랜차이즈 영렘브란트는 지난 10월 17일부터 19일까지 서울 인사동에서 ‘2015 세계어린이미술대회’를 열고 그 수익금의 일부를 국제구호개발NGO월드비전(회장 양호승)에 전달했다. 올해로 2회를 맞은 세계어린이미술대회는 영렘브란트 미국 본사에서 주관했다. 참가자들의 작품을 모두 전시하여 많은 어린이들이 미술에 대한 자신감과 성취감을 얻도록 도왔으며 어린이미술대회 참가자 530명과 작품 전시회 방문객 900여 명의 열띤 참여 속에 성료했다. 특히, 월드비전과의 영렘브란트의 업무협약을 통해 참가비의 30%를 해외저소득층 아동들의 교육 지원을 위해 기부했다.월드비전은 ‘미술로 함께 세상을 치유해요’라는 주제로 참가자와 방문객들을 대상으로 월드비전 긴급구호 현장에서 진행하고 있는 아동보호심리센터(Child Friendly Space)에서의 미술치료 사업과 현지에서 아동들이 재난을 겪은 후 그린 그림을 전시했다.월드비전 홍성호 서울동지부장은 “아동미술치료는 재난지역 어린이들의 심리적인 안정을 위해 꼭 필요한 부분”이라며 “앞으로도 영렘브란트와 함께 세계어린이들의 미술치료와 심리치료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영렘브란트 오은정 대표이사는 “모든 아이는 교육받을 권리가 있다는 영렘브란트코리아의 사훈을 실현하는 중요한 행사이며 건강하고 평등한 미술교육을 위한 첫걸음을 이제 시작하였다”고 소감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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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0-30
  • 황토재의 추억
    나는 젊어서부터 고독을 즐기는 성격을 갖고 있었다.언제부터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생각건데 여섯 살 때 아버지와 네명의 누나들이 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부터가 아닐까 생각한다. 나의 어릴 때 성격은 매우 쾌활했고 누나들을 웃기고 울리기도 잘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자라 나면서 고독을 즐기고 혼자 있기를 좋아했으며 밤길을 걸으며 명상하는 것을 취미처럼 즐기고 있었다. 캄캄한 밤에 혼자 길을 걷다 보면 수많은 철학적 종교적 명제들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인생이란 무엇이며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인간의 목적은 무엇이며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같은 상념에 사로잡힐 때가 많았다.나는 한 때 허무주의에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인생이란 뜬구름이요, 스처가는 바람이며 흘러가는 강물이요 일장춘몽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는 ‘키’없는 배처럼 물결따라 어디론가 떠밀려 가고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지만 기독교에 입문하면서 이 허무주의를 조금씩 극복할 수가 있었다. 성경에서 키워드(Key Word)를 찾게 된 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혼자 밤길을 걷는 취미는 버리지 못하고 있다.1959 년에 있었던 이야기다. 이 때 나는 경남 하동군 청암면 평촌리에서 개척교회 전도사로 봉사하고 있었다. 때는 6월 중순쯤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들녘에는 모심기가 한참이었다. 나는 하동군 북천면 서황리 중촌에 있는 고향집에 가서 다음 날 모심기를 돕기 위해 오후 늦게 청암에서 출발했다. 물새들도 집을 찾아 산속으로 날아 들고 농부들도 일손을 놓고 마을로 들어오는 저녁 때에 나 혼자 집을 나서고 있었다. 밤에 황토재를 넘으면서 옛 추억을 되새기며 깊은 명상에 빠져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내 담력도 시험해 보고 싶었다.대낮에도 혼자 이 험한 재를 넘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야밤에 황토재를 넘는다는 것은 보통 심장을 가지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유유히 흐르는 청암강을 따라 8Km 거리의 비포장 자갈길을 한시간 반쯤 걸어서 횡천면 횡천리에 도착했다. 거리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겼고 마을에는 희미한 초롱불이 여기저기에 켜져 있었다. 황토재가 시작되는 여의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땅거미가 짙게 깔려 있었다.황토재가 시작되는 길목에 이르자 웬 젊은 여성이 혼자 서성거리고 있었다. 인적이 끊긴 재밑에 혼자 서 있는 여성을 보는 순간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 사연을 물어 보았다. 그는 이 재를 넘어야 하는데 용기가 나지 않아 망설이고 있다고 하면서 같이 동행을 하자고 했다. 젊은 여성과 함께 그것도 야밤에 험준한 재를 넘는다는 것은 위험하고 부담스러운 일이기는 하지만 거절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그 여성과 함께 재를 넘기로 했다.나는 먼저 나의 신분을 밝히고 주소지를 알려 주었다. 그러자 여자분 역시 친정집이 북천면 00리에 있다고 했다. 우리는 같은 면 내에서 태어나고 자라났다는 점에서 서로가 안도감을 가질 수 있었다. 우리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황토재의 중간 지점에 이르렀다. 그 곳에는 옛날 한 비단장수가 재를 넘다 강도를 만나 비단봇짐을 빼앗기고 죽임을 당했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그곳에는 이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주인공의 무덤이 있다. 우리가 이 무덤곁을 지날 무렵 나를 뒤따라 오던 여자분이 무섭다며 나에게 바싹 다가와 나의 팔을 붙들었다. 이 순간 나는 귀신보다 여자가 더 무서웠다. 제우스가 남자를 벌 주기 위해 여자를 만들었다는 옛 그리스 신화의 판도라 이야기가 머릿속을 스쳐갔다. 그러나 무섭다며 다가서는 여자를 밀쳐 버릴 수도 없는 터였다.그리고 다음 코스는 황토재에서 가장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가야 한다. 그 때 길가 가까운 덤불속에서 노루가 왝 소리를 지르며 도망을 치자 이에 놀란 여자분은 언덕길에서 미끄러져 넘어졌고 나는 부축했다. 이런 위험하고 아슬한 순간을 반복하면서 황토재의 정상에 이르렀다. 긴호흡을 내 쉬며 안도감을 되찾았다. 밤은 더욱 깊어 지고 있었다. 풀벌레들의 울음소리가 아름다운 선율로 들려왔다. 부엉이가 울어댄다. 짝을 찾는 소리인지 고독을 달래는 노래인지 알 수 없었다. 밤이 깊어지고 있다는 신호가 틀림 없다. 하늘 가까이에서 반달이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이제 우리는 서로가 헤어져야 하는 지점에 도착했다. 황토재가 끝나는 지점이다. 그런데 이 여성은 헤어지기가 아쉬운 듯 머뭇거리더니 뜻밖의 고백을 했다. 자기는 평소 나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나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쉽게 동행을 하겠다고 나서지를 못했을 것이라 했다. 나는 이 여성의 말을 듣는 순간 오늘 밤 내가 큰 시험을 치루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나는 나의 담력을 테스트해 보기 위해 밤중에 황토재를 넘어 보기로 한 것인데 뜻밖에 인격시험을 치룬 것이다.인격시험이란 아무도 보는 이가 없을 때 자기 양심에 따라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지킬 수 있는 의지가 어느 정도인지를 시험해 보는 것이다. 아무리 지력(知力)과 학력(學歷)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해도 인격점수가 낙제점이면 쓸모가 없어진다.나는 지금도 모든 사람들이 깊이 잠들어 있는 시간에 홀로 산책할 때가 많다. 인생은 캄캄한 밤에 홀로 험준한 재를 넘어야 하는 나그네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싶어서다. 그리고 인생의 가는 길은 언제나 밝은 가로등이 내려 비취는 아스팔트길만 계속될 수 없다는 사실도 마찬가지다.인생이 별빛 달빛도 없는 어두운 밤에 산악재를 넘을 때 때로는 좋은 길동무를 만날 수도 있겠지만 포악한 짐승같은 사람을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좋은 사람을 만난다고 해도 갑자기 악마로 돌변할 개연성은 얼마든지 있다고 보아야 한다.그래서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이 나를 지켜 보고 있다는 신전의식(神前意識)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리고 좋은 동반자를 만나 칠흑같은 밤중에 산악재를 함께 무사히 넘었다고 해도 언젠가는 헤어져야 하고 먼 길을 혼자 떠나야 하는 것이 인생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예나 지금이나 그 연습을 계속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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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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