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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토가 그린 ‘유다의 입맞춤’
    헐값에 몸을 내주는 창녀라도 입술만은 함부로 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입술은 한 인간의 마음을 표현하는 가장 중요한 기관인지도 모른다.“유다의 입맞춤”이란 말은 겉 다르고 속 다른 배신자의 행위를 대표하는 말이 되어 있고, 교회미술에는 <유다의 입맞춤>으로 제목 붙인 그림들이 꽤나 많다. 14세기 이태리의 화가 조토 디 본도네의 <유다의 입맞춤>도 그 중 하나. 깊은 밤 겟세마네, 예수가 최후의 기도를 마칠 무렵, 창과 몽둥이를 든 무리가 예수를 에워싼다. 횃불이 타오르고 몽둥이가 춤을 추는 떠들썩한 분위기 한 가운데, 예수와 유다가 마주한다. 유다가 자신의 몸을 예수에게 밀착시키고 웃옷 자락으로 예수를 감싸고 있어, 예수는 겨우 얼굴만 드러내고 있다. 익살스럽게도 유다가 걸치고 있는 겉옷은 진노랑, 전통적으로 유다의 색으로 알려지고 있는 그 빛깔이 아닌가. 중세에는 게토의 유대인들이 걸치지 않으면 안 되었던 빛깔이었고, 2차 세계대전을 즈음해서는 나치가 강제로 유대인의 가슴에 달아주었던 별모양의 표지로 이어지는 그 노란 빛깔이 아니던가. 조토가 훗날 일어날 일을 미리 점치고 있지는 않았을 터. 그러나 그의 그림은 이 모든 일을 알고 있는 것 같으니. 제자들이 무리를 비집고 예수를 구하려 나서는데, 베드로가 칼로 한 병사의 귀를 벨 때 예수가 어떤 말로 제자를 타일렀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런 이야기들이 한 화면에 녹아있다. 이를테면 연극에서 일정한 시간을 두고 이어져 나타날 장면들이 한 화면에서 동시에 녹아나고 있지만, 그림 앞 우리에게는 예수와 유다면 족하다. 입술을 내밀고 있는 유다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는 예수. 두 사람 사이에 뭔가가 흐르고 있다. 노성과 울부짖음의 소용돌이 속에 교통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두 사람 뿐이다. 우리는 유다의 배신으로 예수가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었다고 알고 있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을 구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기도 했다. 예수는 하나님의 그 뜻을 헤아리는 사람. 그러니까 십자가를 필요로 하고 있었던 것은 인류가 아니라 예수였다. 인류를 구하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그림에서 유다의 입술이 예수의 입술에 닿았는지 그렇지 못했는지를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 아무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란 것은 느끼게 한다.우리는 제사장들이 은돈 서른 잎으로 유다를 매수했다고 알고 있다. 30데나리온은 장정이 꼬박 한 달을 일해서 벌 수 있는 금액으로 결코 적은 돈은 아니었다. 그러나 앞 서 한 여인은 유다가 보는 앞에서 예수의 머리에 향유를 부었는데, 그 값이 3백 데나리온이 아니었던가. 명색이 사나이로 태어나서...훗날 유다가 돈을 팽개쳤다는 이야기는 또 무슨... 그럼에도 예수는 주변의 소란과는 관계가 없다는 듯이 태연하기만 하다. 유다를 보는 눈길에는 모멸이나 미움이 보이지 않는다. 화가는 최후의 만찬자리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좋을 뻔했다”하는 예수의 말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을까.겟세마네에서 자신의 최후를 위해 기도하며 흘린 땀이 핏빛이었지만, 하나님은 침묵했고, 예수는 십자가를 결단한다. 예수가 말했다. “보라 때가 가까이 왔다. 인자는 죄인들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 일어나 가자. 나를 넘겨 줄 자가 가까이 와 있다.” 예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열 두 제자중의 하나인 유다가 다가선다. 예수와 유다 사이에 오간 교감을 탐색해보고자 했던 예술가는 숱하게 많다. 그 중 한 사람인 조토가 건져낸 바는 오직 그의 작품을 통해서만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작가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을 수백 년 후의 감상자가 제멋대로 상상하는 노릇을 작가가 용서해 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래도 이 그림을 볼 때 사로잡히는 망상이야 어찌할 수 없으리라.예수와 유다 그리고 열 한 제자들을 에워싸고 있는 무리가 들고 있는 몽둥이와 횃불이 훗날 유럽 여러 곳에 솟아오를 고딕성당을 상징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망상 말이다.“제자들은 다 예수를 버리고 달아났다.” 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그 말씀을 기억하고 밖에 나가 몹시 울었다. 복음서의 증언들은 또 한 번 유다의 배신을 곱씹어 보게 한다.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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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3-30
  • 몽테뉴는 잔혹(殘酷)을 미워했다
    영화 <혹성탈출> 첫머리, 세 사람의 조종사가 미지의 땅을 탐험 하는 중에 한 무리의 벌거벗은 인간을 만나는데, 말을 탄 원숭이가 그 인간을 사냥하는 장면을 기억하는 이들은 적지 않을 터. 불혹을 지나 지천명의 경지를 누리고 있어야할 늙은이가 TV앞에서 눈을 가린 손바닥 틈으로 그 장면을 보다가 손녀에게 핀잔을 듣는 할애비를 독자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실까. 그러면서 만약 총을 쏘는 쪽이 인간이고 쫓기는 쪽이 원숭이라도 그랬을까 하고도 생각해보았다. 게놈 배열에 따르면 인간과 침팬지는 DNA의 98% 이상이 같다는 사실을 떠올리면서 허허하고 웃어버렸지만.<에세이>의 저자 몽테뉴(1533-1592)가 가장 미워한 것은 “잔혹(殘酷)”이라 했다. 그가 태어나서 살아온 시대가 자그마치 30년이나 지속된 전란의 시대였기 때문이리라. 그의 표현대로 “더 이상은 있을 수 없을 것 같은 잔혹한 행위”를 목격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시대를 살아야했다는 운명적 측면이 크게 작용했을 터이지만, <에세이>를 읽어가노라면 더 근원적인 동기는 그가 타고난 품성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프랑스의 16세기는 성격이 다른 두 전쟁을 차례로 경험한 시대. 전반은 이탈리아와의 전쟁으로 1559년에 종결되지만, 후반부터는 소위 종교전쟁시대로 접어든다. 그러나 구교도와 신교도가 각자의 교리와 신앙을 옹호한다는 본래의 목적은 잃어버리고 프랑스의 왕권을 위한 정쟁(政爭)으로 변해 버린다.이 종교전쟁의 발단을 프랑스의 한 마을에서 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는 신교도를 구교도가 습격해서 학살한 사건이 일어난 1562년이라고 본다면, 당시는 막 29세가 된 몽테뉴가 보르도의 고등법원 판사로 재직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해 10월 어린 샤르르 9세가 군대를 이끌고 신교도가 점거하고 있는 루안 성을 포위하고 있을 때, 몽테뉴는 그 포위망 속에 있었다. 앙리 4세가 낭트 칙령에 서명함으로써 길었던 내란을 종결한 것이 1598년, 몽테뉴가 59세로 죽음을 맞은 후 6년째가 되는 해였기에 거의 30년을 종교전쟁 속에서 살지 않으면 안 되었었다. 내란이란 모든 다툼이 국내에서 치러지는지라 전국토가 싸움터가 되어 당사자 보다는 무고한 민중들의 고통이 더 심해질 수밖에 없었고. 우리나라에서도 6.25 전란을 경험해본 세대라면 뼈에 저리게 각인되어 있을 고통이 아니던가.내란의 시대를 산 한 인간의 운명으로서 어쩔 수 없이 목격하지 않을 수 없었던 부조리한 참상들. 전란이 가져다 준 갖은 참혹한 참상들은 몽테뉴가 그렇게도 간절하게 바라던 평온한 삶을 비웃기나 하듯이 바로 그의 삶 위에 덮쳐왔다. “나는 지금 우리나라가 종교전쟁의 난맥으로 말미암아 믿을 수 없을 잔혹이라는 악덕이 구체적으로 차고 넘치고 있는 시기를 살고 있지만, 우리가 날마다 경험하고 있는 현실보다 극단적인 보기는 고대의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렇다고 내가 거기에 길들여졌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인간을 죽이는 쾌락을 위해서만 사람을 죽이는 것과 같은 극악무도한 영혼의 소유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직접 목도할 때까지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이렇다 할 적의도 없으면서 덕도 되지 않는 터에, 다른 사람의 수족을 자르거나, 멀쩡한 정신으로 밑도 끝도 없는 고문이나 살인 방법을 생각해내는 인간, 뿐만 아니라 고통 받으며 죽어가는 인간의 불쌍한 몸짓과 동작, 비통한 울부짖음과 같은 색다른 광경을 즐기는, 단지 그것만을 위해서 연구를 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들이, 나에게는 쉽게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오늘 밤은 배신을 당해서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며, 다만 그 일이 공포도 없고 고통도 없기만을 운명에게 바라면서 잠자리에 드는 일이 몇 차례였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주의 기도를 드리고는 ”극악무도한 병사가 이렇게도 잘 경작되어 있는 밭을 빼앗아버릴 것이다!(베라기우스)“하고 나는 큰 소리로 외치곤 했다.”이것저것 생각하다가 혹 무슨 자료가 없을까하고 이따금씩 뒤져보는 책들 가운데 몽테뉴의 <에세이>도 끼어있다. 찾던 자료가 아닌데도 문장에 이끌려 시간가는 줄 모르고 파묻혀버리는 수가 있는 책이기도 하다. 그의 글은 언제나 현재형의 글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자상하고 고운 그의 마음씨 가 배어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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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범
    2018-03-22
  • 소크라테스 재판
    시오노 나나미의 <그리스인 이야기> 전 3권이 완간되었다. 3권 제1부 “도시국가 그리스의 종언” 들머리에 실린“소크라테스 재판”의 대강을 소개해 본다. 기원전 399년의 봄, 아테네. 70나는 소크라테스가 재판정에 섰다. 고발자는 미레토스. 역사는 그가 소크라테스를 고발했다는 사실로만 그를 기억한다. 이름을 날려보려 발버둥치는 조무래기를 조종하는 것은 아나토스와 또한 사람의 민주정부의 거물. 결과적으로 소크라테스를 죽인 것은 소수 지도자가 통치하는 과도정(오리가르기아)이 아니라, 모든 시민이 참여하는 민주정(데모크라티아)이었다. 소크라테스의 혐의는 두 가지. 그리스 전래의 신들에 대한 신앙이 무시되고 있다는 것과 아테네 젊은이들에게 철학을 가르쳐서 나쁜 영향을 끼쳤다는 것. 독신 죄에 대해서는 잠간 미뤄두기로 하고, 아테네의 젊은이에게 철학을 가르쳐 나쁜 영향을 주었다는 죄목에 대해서 살펴보자.당시 아테네 사람들이 떠올렸을 두 인물은 알키비아데스와 크리티아스. 둘 다 소크라테스의 제자로 알려져 있었고, 도시국가 아테네에 해를 끼치고 있다고 인정되고 있었다. 알키비아데스는 법정의 출두명령을 무시하고 스파르타로 도망가서 조국에 해를 끼칠 정보를 스파르타에게 넘겨주었고, 크리티아스는 30인정권이란 이름의 과두정부를 수립해서 아테네에 공포정치를 가져왔다는 것. 그러나 알키비아데스는 5년 전에 암살되었고, 크리티아스도 4년 전에 전사했다. 그런데 왜 지금? 요직을 맡을 수 있는 나이가 30 세로 정해진 아테네에서 알키비아데스가 스파르타에 망명한 것은 35세가 되는 해였고, 크리티아스가 공포정치를 편 것은 그의 나이 56세 때. 성인이 된지가 이미 오래인 제자의 책임까지 청소년시절의 스승이었던 이가 감당해야 된다는 말인가?소크라테스는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쳤다. 그 결과가 민주파가 되 든 과두파가 되든 그것은 철학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다만 소크라테스 자신은 징집되어 전쟁에 참여했었고, 선출되어 국가공무원을 지냈다. 그것은 아테네가 민주정을 펴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조국이기에 책무를 다한다는 자연스러운 애국심에서였다. 그러니까 제자 중에 민주파가 있건 과두파 추종자가 있건 그에게는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추천으로 뽑은 5백의 시민이 재판정에 모였다. 고발자 미레토스는 피고 소크라테스의 죄상을 들어 비난하고 사형에 처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한다. 투표결과는 유죄 250, 무죄 220. 차이는 30표. 유죄와 무죄의 차가 크지 않으면 벌금형이나 타국에 망명하게 하는 정도의 형벌로 재판이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타협안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는 정공법으로 “변명”을 전개한다.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들은 후에 실시한 투표 결과는 유죄 360, 무죄 140으로 돌변한다. 소크라테스가 재판인들을 노엽게 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죄목을 인정할 수는 없지만, 두 차례나 징집되어 전장에 갔었고, 피선되어 공무원으로 봉사해서 아테네 시민의 책임을 다했던 소크라테스이고 보면, 자신을 재판하는 아테네의 법 또한 아테네의 법인 이상 복종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변명의 요지가 재판관들을 노하게 했다. 왜? 저자 시오노는 당시 아테네인들이 나라의 운명을 결정할 수 없는 정황 속에서 초초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라 보았다. 나의 운명은 내가 결정한다 하고 말한 소크라테스가 미워진 것. 초조해하는 자신들과는 달리 침착해하는 소크라테스에게 분노를 퍼부은 것이었다. 그들의 조국 아테네가 민주정은 부활했으나 일관된 정략도 찾지 못한 채 초조불안해하고 있는 자신들의 책임을 타자에게 전가하고 싶었을 것이라는 것. 희생양 소크라테스는 죽음으로 자신의 철학을 완성하지만, 아테네는 그들 곁에 남아 있는 애국자를 사형함으로써 영영 미로에서 탈출할 힘이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말았다는 저자의 생각에, 그것을 소크라테스의 성공이라 보아야할지는 각자에게 맡길 수밖에 없다는 꼬리표를 단다.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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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범
    2018-03-08
  • ‘베니스의 상인’은 누구?
    얼마 전, 본란에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 관계되는 글을 올렸을 때, 면식이 있는 한 독자에게서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 질문에서 뭔가 석연치 않다는 낌새가 느껴져 베니스의 상인이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어보았다. 대답을 망설이기에 “혹 유대인 샤일록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요?” 했더니 “그렇지 않느냐?”며 되물어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 독자는 베니스의 상인이 바로 유대인 고리 대금업자 샤일록이라 믿고 있는 것이었다. 이럴 수가 싶어서 다시 몇 친구들에게 비슷한 질문을 해보았더니, 이게 웬 일인가 다들 “베니스의 상인은 유대인 샤일록”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서둘러 정답(?)부터 밝혀놓기로 하자.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은 유대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이 아니라, 안토니오를 가리킨다. 공들여 원작을 읽은 이가 그리 많을까마는, <셰익스피어 이야기>와 같은 해설서를 통해서라도, 주인공 베니스의 상인이 샤일록이 아님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을 터인데도, 적잖은 이들이 혼돈하고 있는 데에는 무슨 까닭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혹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는 유교적 직업관이 은연중에 작용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혹 하는 마음으로 일본의 문헌을 뒤졌더니, 아니나 다를까 1995년 <문예춘추(文藝春秋)> 2월호에 실린 <베니스의 상인에 대한 큰 오해>라는 글이 있었다. 당시 일본의 언론들이 “모든 악의 근원은 베니스의 상인이 되어버린 일본인의 정신구조에 있다”며, 일본 땅값 상승의 책임을 논하고 있는 논평자들의 무식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글이었다. 그 글이 일본사회에 상당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음은 말할 필요가 없었으리라. 훗날에 널리 읽혀지고 있는 작가 이츠키(五木寬之)는 “나도 베니스의 상인은 대금업자 샤일록이라고 알고 있었다. 부끄러운 일이다.”하고 고백하기도 했다. <베니스의 상인>의 주 무대가 되어 있는 베니스의 정서는 사뭇 달랐다. 우리가 상인이라 번역하고 있는 merchant는 함부로 얕잡아 볼 수 있는 그런 대상이 아니었다. 상인 안토니오는 베니스에서 존경 받고 있는 인사이다. 샤일록은 안토니오의 고결한 인격을 드러내기 위한 들러리인 셈이다. 유대인 “샤일록”은 히브리어 shalach에서 유래한 단어로 욕심쟁이라는 뜻. 셰익스피어가 <베니스의 상인>을 쓰기 전에 영국에서는 유대인 고리 대급업자를 다룬 연극이 더러 상연되었었다. 1564년생인 셰익스피어가 <베니스의 상인>을 쓰기로 마음먹은 1596년은 동갑내기 동업자 크리스토퍼 말로가 얼마 전에 <마르타 섬의 유대인>으로 크게 성공을 거두었을 즈음이었다. 그 작품에서 유대인의 이름은 바라바스. <마르타 섬의 유대인>이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지만, 아니 그랬기 때문에 셰익스피어는 투지를 불태워 비슷한 주제의 작품을 구상했는지도 모른다. 두 작품 모두가 지중해의 무역도시를 무대로 해서 무자비한 대금업자 유대인을 중요한 등장인물로 다루고 있다. 두 인물 바라바스와 샤이록은 크리스천들의 차별과 박해에 대해 깊은 원한을 품고 있다. 간교한 수법으로 원풀이를 꾀하지만 결국에는 자기가 판 우물에 빠지게 된다는 줄거리가 비슷하다.그러나 <마르타 섬의 유대인>에서 바라바스는 연극 전체를 압도하는 주역이어서 모든 대사의 49%가 바라바스의 몫으로 배정되어있다. 그러나 <베니스의 상인>에서의 샤일록은 아주 강한 인상을 주는 등장인물이긴 해도 주역은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준 주역이라고나 할까. 총 20장면으로 구성되고 있는 연극에서 샤일록이 등장하는 것은 고작 다섯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제목은 <베니스의 유대인>이 아니라 <베니스의 상인>인 것이다. 물론 제목에서의 “상인”은 진정한 주인공 안토니오가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여기서 상인이라 불리고 있는 인물은 샤일록이 아니라, 대무역상 안토니오라는 것은 확실하다. 샤일록은 연극 <베니스의 상인>을 구성하는 몇 개의 줄거리 중의 하나에 속한 배역의 하나에 불과하다. <베니스의 상인>에서 중심 줄거리는 어디까지나 베니스의 상인 안토니오가 친구 밧사니오가 사랑하는 포샤와 결혼할 수 있도록 돕는데, 그 과정에서 유대인 샤이록의 모함으로 하마터면 큰 일 날 뻔했지만, 모두 해피엔드로 끝이 난다는 코미디이다.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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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범
    2018-02-23
  • 우산과 양산 그리고 거짓말
    “남자라면 우산과 거짓말은 늘 지니고 다녀야지!”하는 처세훈을 듣게 된 것은 제대로 철들기 전부터였다. 집안 어른들 눈에 응석받이 외동아들의 앞날이 영 미덥쟎아 보였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렇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거짓말은 모를까 현실적으로 아이들이 지니기에 우산은 너무 값진 물건이었다. 처세훈이라기보다는 익살의 함량이 더 짙었을 어른들의 말씀을 나름대로라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은 그로부터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나서였으니 어른들의 염려는 근거가 아주 없지는 않았다는 말이 되는 것 같아 그 때 그 어른들 모습이 선하게 떠오르곤 하는 요즘이다. 그런데 우산과 거짓말이 서로 통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 것은 우연히 우산의 기원을 알게 되고나서부터다. 우리말로 우산은 비 우(雨)에 우산 산(傘)을 쓰고 있어 비를 피하기 위해서 쓰는 연장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고대 오리엔트나 이집트에서는 종교의식에서 사용하는 권력의 상징으로 쓰였다니 말이다. “영어 umbrella는 라틴어 움브라(umbra)”, “그리스어 옴브로스(ombros)에서 왔고 그 뜻은 그늘”, “고대 앗시리아의 수도 니네베가 출처”, “이집트에서 우산모양의 상형문자는 “주권”을 의미하는 문자와 같다“. 이 정도의 정보만으로도 능히 짐작할만하지 않는가. 우산이 신적 상징에서 벗어나 그늘을 만들어 주는 편리한 도구가 된 것은 그리스와 로마시대에 이르러서였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이 미사에 우산을 사용하게 되자 적어도 르네상스 초기까지는 함부로 우산을 썼다가는 불경죄로 몰릴 수도 있었으리라는 추측이 설득력을 지니게 된다. 이후 포르투갈의 식민지 개척자들이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사용하면서 곧 프랑스와 영국등지로 퍼져간다. 카트리느 메디시스와 스코틀랜드의 메리여왕이 애용하게 되고. 그러니까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우산은 없고 양산만 있었던 셈이다.우리나라에서는 백제시대에는 이미 사용되고 있었다는데, 백제의 성명왕(聖明王)이 일본으로 우산(일산)을 보내주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오늘날 우리가 쓰고 있는 것과 같은 우산이 등장하는 것은 17세기라지만, 귀부인에게만 사용권이 제한되어 있었단다. 18세기가 되면서 식당이나 커피 점에 우산을 비치해두고 부인들이 가게를 나와 마차를 탈 때까지 사용할 수 있게 했다는 것. 그러나 혹 남자가 사용했다가는 웃음거리가 되었다니…이쯤 해두기로 하고. 영국인들이 런던거리에서 우산을 쓴 신사를 목격하게 된 것은 18세기 중엽이나 되어서였다. 페르시아인 여행가 조나스 한웨이가 우산을 쓰고 런던거리를 활보하자 그 모습에 열광한 남성들이 앞 다투어 우산을 들고 나섰다지만, 당시만 해도 그 유명했던 영국신사의 우산은 스틱을 대신했을 뿐으로 신사들의 모자와 옷을 보호해주는 우산 본래의 구실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세월을 기다려야했단다. 제임스 스미스 앤 썬즈 회사가 런던에서 나무나 고래 뼈로 만든 뼈대에 기름 바른 캔버스로 만든 우산을 생산 판매한 것은 1830년이었고, 1852년에는 직조기 제조업자 사무엘 폭스가 철제우산을 생산하면서 우산은 급속하게 발전 보급한다. 우산 모양이 획기적으로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접이식 우산이 나타나면서였다. 그러니까 남자가 거짓말만큼이나 쉽게 우산을 지닐 수 있게 된 것은 그때부터였다고 할 수 있다. 1920년대에 들어서서 독일인 엔지니어 한스 하우프트가 간편하게 휴대할 수 있는 접이식 우산을 만들었지만, 신사보다는 숙녀들만의 필수품이 되어 버렸다는 데... 그렇다고 우산이나 파라솔이라 일컫는 부인용 양산은 아무나 쉽게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집집마다 식구 수대로 갖추어 두기는 어려웠다. 아이들은 어른의 눈을 피해서 몰래 우산을 가지고 놀다가 꾸중을 듣기도 했다. 이제 우산과 양산은 그 어느 시대보다 손쉽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소나기가 오면 가까운 편의점에서 싼 값의 우산을 구입하고, 비가 그치면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휴지통에 버린다. “우산이나 양산 고치세요!”하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한참 되는 것 같다. 고칠 필요가 없어진 것은 우산만은 아니게 된 것인지도 모르지만...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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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범
    2018-02-12
  • “개띠 해”라는 데...
    “개띠 해“라는 데, 개와 인간과의 관계를 보도하는 뭉클한 뉴스는 정작 올 해가 개띠 해인지를 알지 못하고 있을 법한 프라하에서 날아왔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새해 들어 몇 날 되지 않은, 정확하게는 2018년 1월 3일,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한 아파트에서 몇 주 전에 사망한 주인의 시체를 지키며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한 마리의 개를 발견했다는 것. 올해 아홉 살이 되는 하바니즈 견의 이름은 “Zaszsa”(어떻게 읽어야할지 몰라 그냥 알파벳으로 적는 것을 용서하기 바란다). 사람들이 발견했을 때 개는 심각한 탈수 상태였다나. 고령의 여인이 한 동안 보이지 않게 되자 이웃 사람이 경찰에 신고했고, 경찰이 집안을 조사했더니, 자연사한 지 꽤 되는 듯싶은 66세의 여인 곁에 Zaszsa가 주인의 시신을 지키고 있었단다. 탈진한 상태여서 조금만 늦게 발견되었다면 죽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 수의사들의 진단. 이제는 서서히 회복하고 있는 듯 쓰다듬어주는 동물애호가단체 회원들에게 꼬리를 흔들어준다고 했다. 외롭게 죽어가는 늙은이를 그것도 사후에까지 돌보아 준 것이 사람이 아니라 개였다는 미담(?) 한 토막이 개띠 해 첫머리를 흐뭇하게 데워준다. 그러나 성서에서는 그런 미담을 남길만한 개를 찾아볼 수가 없다. 대체로 옛 팔레스티나 지방에서는 가축으로 기르는 개가 그리 흔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들의 눈에 개들이란 길들여지지 않는 야생상태의 짐승들로, 흡사 늑대와 같은 존재로만 비쳤을 지도 모른다. 그들 대부분은 양치기였기에(창 47:3) 당연히 양을 치고 지키기 위해서 개를 이용했을 법하나 실제로는 양 무리를 다스리기 위해 개의 힘을 빌리는 일은 전혀 없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양치기 스스로 선두에서 양떼를 인도하는 것이 이상형이었다. (요 10:4) 이 독특한 이스라엘의 습성은 지금도 전통(?)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는데, 현실적으로 이스라엘에서는 호주나 영국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대규모 목장을 경영하고 있지 않아서일 거라고 짐작해보게도 되지만. “그들은 저녁만 되면 돌아와서, 개처럼 짖어 대면서, 성 안을 이리저리 쏘다닙니다.”(시편 59:6) 하는 표현이 대부분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알고 있는 개에 대한 선입견이었던 것 같다. 그런가하면 지도자를 개에 비유해서 야유할 정도였으니. “지도자라는 것들은 굶주린 개처럼 그렇게 먹고도 만족할 줄을 모른다. 백성을 지키는 지도자가 되어서도 분별력이 없다. 모두들 저 좋을 대로만 하고 저마다 제 배만 채운다.” (이사야 59:11)만약 수도 없이 개체가 늘어난 개들이 성서를 읽을 수 있다면, 적어도 성서가 그리고 있는 개들처럼 사납다면, 억울해하기보다는 분노해서 성서를 물어뜯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러나 적어도 구약성서 시대의 팔레스티나 사람들은 개들이 싸움터에 모여들어 전사자를 뜯어 헤쳤다거나, 사람의 피를 빨고 죽은 자의 고기를 먹는다는 정보를 입수하는 것이 예사로웠고, 오늘날에도 팔레스티나에서는 그런 광경을 어렵잖게 볼 수 있다고 한다. 한편 개에 대한 이미지를 자신에게 적용해서 지극한 겸손을 나타내기도 했다. “개보다 나을 것이 없는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그런 엄청난 일을 저지를 수 있겠습니까?’”(왕하 8:13)하는 모양으로. 개에 대한 시선은 <신약>에서도 달라지지 않는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줄 수 없다”는 예수의 언급도 그렇지만, 바울도 “개들을 조심하라”하고 경고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개가 거들어 한 여인이 사랑하는 딸을 죽음에서 구할 수 있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야기는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서,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다.”로 시작된다. 예수가 거기를 떠난 것은 이를테면 “발의 먼지를 터는 행위”였을 지도 모른다. 바리새파 율법학자들, 직업적인 종교인들이 우글거리는 그곳을 떠났다고 읽어보자. 어느덧 몸에 배어버린, 그래서 어느덧 절대화해버린 체취. 예수는 그 냄새에 진저리가 난다. 그러나 이방인의 세계에서 예수는 한 여인의 말을 듣는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 개만도 못한 자가 되어 간구하는 한 여인의 소원을 예수는 듣는다. 그리고 여인은 소원을 이룬다.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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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범
    2018-02-03
  • 우신예찬(愚神禮讚)
    <에라스무스의 승리와 비극>의 저자 츠바이크가 썼다. “그는 죽었다. 홀로 외롭게... 그러나 결정적으로 그에게는 독립과 자유가 있었다.”에라스무스가 생애를 바쳐 지키려 했던 것은 한 마디로 자유, 그 누구에게도 구속되지 않는 자유였다. 역설적이게도 그는 그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서라면 아부나 흥정마저 마다하지 않았고, 동정심을 버리고도 후회하지 않았다. 호이징거가 말한 것처럼 그가 미워한 것은 “절대적인 확신”, 확신이 절대와 어울리면 광신이 되는 것을. 에라스무스가 가톨릭 쪽에도 프로테스탄트 쪽에도 편을 들지 않은 것은 사실이라 할 수 있지만, 내심 개혁자 루터의 항거에 상당한 공감을 지녔던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랬던 그로 하여금 루터를 멀리하게 한 것은 바로 루터의 “격정”과 “거침” 그리고 개혁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절대적 확신”이었다. 에라스무스는 하나님 말고 그 무엇에도 절대라는 수식어를 붙이지 않았다. 정의라고 생각되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인간의 어떤 의견, 어떤 주장도 결코 절대적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자신을 포함해서.“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가 다 같이 내세우는 예수는, 세리의 부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지만 이해하려 했고, 바리새인들의 정의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인정하고 있는 터였지만 그들 편에 서지는 않지 않았느냐”면서. <르네상스 정신사>의 저자 드레스덴은 말했다. “에라스무스와 동 시대 사람들 중에는 ‘그가 가면을 쓰고 있는 무신론자’라고 믿는 이들이 있었는가하면, 다른 편에서는 ‘너무나 비겁해서 루터가 개척한 길에 뛰어들 수 없었다.’하고 비난하기도 했다.”논쟁을 싫어하고 독선을 미워해서 격정에 휘말리기를 싫어한 에라스무스는 차라리 인간의 어리석음에 눈을 돌렸다. 인간본성의 어리석음을 한껏 비꼰 작품이 <우신예찬>이다. 로테르담의 데지데리우스 에라스무스(1466-1536)가 <우신예찬>을 쓰기로 마음먹은 것은 1509년 여름, 이탈리아를 떠나 영국으로 가고자 말 등에 흔들리면서였다. 당시 이탈리아는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용병을 모아 볼로냐를 공격하고 있었고, 성직자들은 부패와 타락에 파묻혀있었다. 그러나 영국에는 그를 맞아줄 친구 토마스 모아가 있을 것. 모아를 생각하며 그와 대화하듯 <우신예찬>을 엮어간다.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의 원수인 “우신(어리석은 여신)”모리아는 모아의 라틴어 이름 모르스에서 따왔다나.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어리석음이 넘치고 있는지를, 속속들이 바보 여신 모리아의 입으로 고발한다. 철학자와 신학자의 되지 못한 논쟁, 군주와 신하들의 공명심, 교황을 비롯한 성직자들의 위선, 그리고 가장 큰 바보짓인 전쟁, 이 모두는 바보 신의 승리의 결과라고 서술한다. 우신은 이죽거린다.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을까? 그런데 그 생명은 나의 도움을 받지 않고 생겨날 수 는 없지 않는가?... 신들이나 인간은 도대체 어디에서 태어나는가?... 머리에서도 가슴에서도 아니지 않는가. 차마 웃지 않고는 입을 뗄 수 없는 기관을 통해서가 아니던가...” 우신 모리아는 인간의 부조리를 두고 우스꽝스럽게 너스레를 떤다. 우신에게는 많은 젊은 처녀들이 시중들고 있다. “자만” “추종” “망각” “게으름” “열락” “무사고(無思考)” “방탕” “탐식” “잠꾸러기”가 그녀들의 이름. 이들의 도움으로 인간세계에 행복을 뿌려 주고 있는 것이 자신이라며 우신은 힘자랑을 늘여 놓는다. 에라스무스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철저하게 폭로한다. 모든 것이 백일하에 드러나노라면, 인간은 잘난 척 하거나 그럴듯한 표정을 지어보이거나 현명한 척 해보았자 결국은 웃음꺼리가 될 수밖에 없지 않느냐며. 또 한 살을 보태는 마당에, 찔끔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을 떠올리는 것은, 나이 들수록 더 바보스러워지는 자신의 모습 때문인지도 모른다. 에라스무스가 동경했던 자유 말고 무엇을 더 바랄 수 있을까 하고 끄덕이면서도, 그게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지 않는 터라, ‘에라’하고 에라스무스가 소중하게 여기던 “너그러움”에나 기대어보자 한다.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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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범
    2018-01-22
  • 안심과 불안의 변증법
    <죽음의 집의 기록>은 도스토예프스키가 시베리아의 작은 마을에서 만난 한 유형수의 수기로 꾸며지고 있지만, 작가 자신이 젊었을 때 유형지 시베리아의 감옥에서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작품. 그는 1849년 페트라셰프스키 사건에 휘말려 옴스크 감옥에서 4년간 복역했었다. “옥사는 유지로 만든 양초가 희미하게 비추고 있고, 숨 막힐 듯 무거운 냄새로 가득한, 길고 좁고 후텁지근한 방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내가 이곳에서 10여년을 살아왔는지 이해할 수 없다. 평상 위 나의 몫이란 세 장의 판자뿐, 방안의 평상에만도 30명이 자리를 잡고 있는데, 겨울에는 일찍 빗장을 지르는 까닭에 모두들 잠들 때까지 네 시간이나 기다려야만 했다. 하지만 그전까지는 웅성거리는 시끄러운 소리와 웃음, 욕설, 쇠사슬 소리, 악취와 그을음, 삭발한 머리들과 낙인찍힌 얼굴들, 남루한 의복, 이 모든 것들이 욕설과 혹평의 대상이 되곤 했다... 그러나 인간은 불멸이다! 인간은 모든 것에 익숙해질 수 있는 존재이며 나는 이것이 인간에 대한 가장 훌륭한 정의라고 생각한다.” “나는 동료중의 한 사람(귀족출신)이 마치 꺼져가는 촛불처럼 감옥 안에서 쇠해가는 것을 공포를 느끼면서 보고 있었다. 나는 그를 보면서 생각했다. 저렇게는 되지 않아야지. 나는 살고 싶다. 그러니 살아 보일테다 하고 노역에서 더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감옥에서 그 저주스러운 삶의 불편들을 견디어 내기 위해서는 육체의 힘이 정신력에 못지않게 필요했다.” 그렇게 주인공은 어느 듯 익숙해질 수 있었다. 그렇지 못했다면 어떻게 10년을 버틸 수 있었을까. “익숙해진다는 것은 곧 사는 것”이었다. 그러나 역으로 익숙해진다는 사실은 살아있다는 실감을 잃어버리게 하는 것이기도 했다. 익숙해지려 애쓰다 익숙해져 버리고 나면 익숙해진 환경이 참을 수 없어지게 된다. 이것이 인간의 역설적 구도이고 보면, 인간은 다시 그 환경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게 되는 것. “죽음의 집”에서의 처음 3일간, 주인공은 끊임없이 중얼거린다. “나는 감옥에 들어왔어! 나는 감옥에 들어왔어! 여기가 나의 삶의 터전이야...진정 인간이란 그 때 그때 어울리는 삶의 힘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어떤 일에도 익숙해지는 생물이다. “ 주인공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면서 완전히 익숙해진 상태를 꿈꾼다. 이리하여 유형수는 어느덧 “죽음의 집”의 삶에 익숙해져서 그 형기가 십년이 되건 이십년이 되건 결코 절망하지 않고 살아가게 되는 것. 그가 거기서 살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익숙해짐으로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단 익숙해지고 나면 이번에는 “삶”의 충실감을 잃어버리게 되는 법. 나날의 단조로운 반복이 인간의 영혼을 침식하기 때문이다. 살고 있다는 안도가 이제는 살아있다는 실감을 앗아가고 있지 않는가. 주인공은 정신적 부식과 새로운 전투를 버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희망을 불태워 그 권태를 이겨나가려 안간힘 했다. “나는 감옥생활 첫 날부터 벌써 자유를 공상하기 시작했다. 나의 옥중생활이 언제 끝나게 될지에 대해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상상해보는 것이 가장 즐거운 일이 되었다 그일 말고는 그 무엇도 생각할 수 없었다.”우리의 주인공만은 아니었다. 거의 모든 유형수들이 그런 희망을 안고 살아가고 있었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바보스런 짓거리로 비칠 수도 있으리라. 누구라도 곰곰이 생각하노라면 그건 바보스런 짓거리라는 결론을 얻게 될 일. 그러나 그 바보스러운 생각이야말로 그의 영혼을 부패로부터 구해줄 수 있는 유일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유형수들은 죽음의 집에서의 삶에 익숙해짐으로 살아가는 동시에 다른 한편 그 삶을 부정함으로서도 살아갔다. 도스토예프스키가 훗날 “안심과 불안의 이상한 변증법”이라 술회한 것은 이를 염두에 두었을지도 모른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작가의 일기>에서 “감옥은 길고 긴 학교였다.”하고 술회했다. 그에게 있어 옴스크감옥에서의 삶은 생각하기도 싫은 그래서 씻고 또 씻어도 지워지지 않는 혐오스럽기만 한 그런 체험만은 아니었다. 그는 감옥에서도 인간에 대한 흥미를 잃지 않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지긋지긋한 강제공동생활과 귀족출신인 자신이 평민죄수들의 적의에 압도되지 않을 수 있었다. 같은 감옥에서 거의 폐인이 되어버린 귀족친구 두루프와는 달리.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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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범
    2018-01-05
  • “이집트로 피난 가는 길에서 휴식하는 성가족”- 카라바지오의 그림-
    16세기의 괴짜 화가 카라바지오(Michelangelo Merici da Caravaggio 1573-1610)가 그린 “이집트로 피난 가는 도중에 휴식하는 성가족”에서 어쩌면 우리는 가장 요셉다운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닐까. 화면 한 가운데 거의 벗은 모습으로 바이올린을 켜고 있는 천사는 유난히 밝은 조명을 받아 빛을 발하고 있지만 감상자에게는 뒷모습만 보여줄 수 있을 뿐이다. 반면, 화면 왼쪽에서 천사를 위해 두 손으로 악보를 받쳐 들고 있는 요셉에게는 조명은커녕 칙칙한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그러나 감상자들은 그의 자세와 표정만을 훤히 읽을 수 있다. 무척 늙어 보이는 요셉, 주름이 새겨진 살갗은 차라리 흙빛인데다, 보따리 위에 올려놓은 맨 발은 나귀등에 산모와 아기를 싣고 먼 길을 걸어온 피로를 여실하게 보여준다. 발치에 놓인 포도주 병과 컴컴한 뒤편에 메여 있는 나귀는 말없이 요셉의 수고를 거들어주고 있는 것도 같다. 그러나 천사를 응시하고 있는 요셉과 나귀의 시선은 어둠을 뚫고 감상자들에게 많은 것을 보여주고 있다. 천사를 비추는 조명은 그림 오른 편 마리아와 아기도 비춘다. 지친 마리아는 눈을 감은 채 잠든 아기 예수의 머리를 감싸 안고 있다. 그녀의 붉은 머리칼은 애처롭기만 한데, 천사의 바이올린도 그녀의 피로를 달래주지 못하는 것일까. 눈은 감았어도 애써 아기 예수의 머리를 지켜보는 것 같다. 전체적으로 붉은 옷의 어머니와 아들의 흰 살결은 흰옷을 입은 천사 못지않게 밝은 조명을 받고 있어, 그늘의 요셉과는 뚜렷한 대비를 보여준다. 요셉에게서는 아버지다운 그 무엇을 찾아볼 수 없다. 고요만이 요셉을 둘러싸고 있을 뿐. 역사에는, 자신을 신불(神佛)의 환생(還生)이라거나 사자(使者)라 일컫거나, 나아가서는 자신이 곧 신이거나 부처 혹은 구세주라며 사람들을 현혹한 독재자나 교조는 수도 없이 많았다. 그리스도교에서도 예수를 자처하거나 자신이 성모 마리아라고 우기는 인사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을 요셉이라거나 그와 관계된 어떤 인물이라 내세우는 인사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요셉이 풍기는 이미지는 권력이나 위용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다고 요셉에게서 금욕(禁慾)을 앞세운 고고한 수련자의 모습이나 신비적인 상징을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가하면 남달리 검소하고 부지런하여 재물을 쌓거나 기업을 이룩한 소위 모범적인 시민의 흔적도 더듬어 볼 수 없다. 요셉은 단지 한 아기의 아버지, 그것도 혈연으로는 아무런 연고가 없는 한 아기의 양육자로만 일관했다. 후광을 뿜어내는 성자도 전설 속에 묻혀있는 순교자도 기적을 일삼는 초월적인 능력자도 아니었다. 가족을 희생하면서도 자신의 이상을 추구하는 이상주의자도 자기 탐구에 몰두하는 철학자나 종교인도 아니었다. 남달리 예민한 감성으로 인생의 부조리에 절망하여 세인의 눈길을 끌 수 있는 예술인도 될 수 없었다. 자신이 이룰 수 없었던 꿈을 자식에게 지워주며 기대와 압력을 가하는 교육적인 아비도 아니었고, 가문을 위해 자식을 일정한 틀에 맞추어보려 애쓴 가부장도 아니었다. 자식이 자신을 이해해주지 않는다고 슬퍼하거나 반대로 자식의 눈치나 살피는 아비도 아니었고. 그렇게 요셉은 힘 있는 아비도 그럴 듯한 지아비도 못되었다. 지어미와 아들을 지키기 위해 칼을 빼들고 싸우지도 못했다. 그저 하늘의 음성을 구실로 닥치는 위해는 피하기만 하며 “양육하는 아비”의 분수를 지키기에 급급해하는 이를테면 별 볼 일없는 지아비요 아비였다. 요셉과 마리아는 육체적인 부부는 아니었기에, 마리아의 아들은 요셉의 아들은 아니었다. 처음부터 성가족에게는 훈훈하다거나 아기자기한 가족의 이미지가 들어설 공간이 마련되어 있지 못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런 성가족을 안고 있는 그리스도교였기에 오히려 형제애를 이미지 할 수 있었다. 모든 아버지는 양아버지이고, 모든 아기는 양자가 아니던가. 제 자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식을 양육하는 것이 성가족인 것을. 그러니까 그리스도교 세계에는 고아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은 아들을 제물로 삼아 다른 모든 인간들을 양자로 받아들인 것을. 괴짜 화가 카라바지오가 이 그림을 그린 것은 1595년경이었다고 전해오는 데, 희한하게도 그는 이 그림을 그린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살인자로 몰려 도망치는 신세가 되었다나.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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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범
    2017-12-23
  • ‘Am I Too Loud?’- 피아니스트 제럴드 무어-
    음반을 통해서 클래식 음악을 즐겨온 사람이라면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고, 그는 바리톤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와 피아니스트 제럴드 무어를 기억할 것이다. 디스카우는 적어도 일곱 번 이상 <겨울 나그네>를 녹음했고, 두 세 차례 이상을 제럴드 무어와 협연했다는 기록만으로도. 피아니스트 제럴드 무어(Gerald Moore, 1899-1987)를 말하면서 굳이 <겨울 나그네>와 바리톤 디스카우를 앞세워 운을 띄우는 것은 피아니스트 무어의 연주활동이 가곡의 반주나 다른 연주자와의 협연에 한정되어있다는 사정 때문. 그래서 제럴드 무어라는 이름 앞에는 “반주자”란 타이틀이 따라 붙기 마련이지만, 파브로 카잘스, 엘리자뱃 슈만, 매기 테이트, 캐서린 페리, 등, 수많은 명연주자들이 그와 공연하기를 원했고, 수많은 명반을 남길 수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반주자란 가수에게 종속되어 있는 존재로 여겨졌다. 연주회에 따라서는 프로그램에 반주자의 이름은 올려놓지 않기가 예사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성악이나 기악 가릴 것 없이 리사이틀에서 반주자의 이름이 무시되는 일은 거의 없게 되었다. 제럴드 무어야말로 반주자를 동등한 공연자로 올려놓은 장본인이었다. 그는 자신의 음악적인 주장을 남달리 강하게 내세우지는 않았다. 1962년에 출간한 반주자로서의 자신의 회상록 <Am I Too Loud?>의 제목이 보여주듯, 겸손과 조화를 앞세우는 자세로 일관했다. “내 소리가 너무 크지는 않나요?” 하고 협연 상대에게 겸손한 자세로 임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남달리 소심하다거나 아부하는 체질을 타고 난 탓은 아니었다. 갈고 닦은 연주 실력에 더해 충분한 인문적 지식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었다. “내 소리가 너무 크지 않느냐?” 하고 말하는 것은 공연하는 가수를 두드러지게 하기 위해 소극적인 반주를 하겠다는 자세가 아니라, 음악의 요구에 보다 적극적으로 응답하는 연주를 하겠다는 자세를 유머에 담아 보내는 메시지였다는 것. 무어의 친구이기도 했던 매기 테이트가 그녀의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음반을 들으면서 제럴드 무어와 다른 피아니스트를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터이다. 그가 다른 피아니스트와 구별되는 자질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그가 마이크로폰과의 거리에 걸맞게 팔의 무게를 조절할 줄 알기 때문일 것이다.”친구의 칭찬을 되받아 무어는 말한다. “나는 매기의 칭찬에 감사한다. 그러나 그 칭찬에 대한 설명은 간단하다. 그것은 내 자신이 마이크로폰과의 거리에 따라서 강약을 조절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나의 의견을 보탤 수 있다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긴 하지만, 나와 공연자에게서 균형 잡힌 소리를 녹음해야하는 책임은 어디까지나 녹음담당자의 몫이란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더 보탠다면 내가 연주한 레코드에서 나의 피아노를 충분한 음량으로 들을 수 있다고 한다면, 다시 말해서 그 녹음이 완전하게 규형 잡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녹음담당자의 공적인 것이다.” 우리는 위의 두 글에서, 두 사람의 상반된 강조점을 두고 어느 쪽이 옳고 그른가를 가려내기 보다는, 두 사람의 깊은 속내를 헤아릴 수 있어야 하리라. 한편 무어의 글에서는 따끈한 회초리도 감지할 수 있다. 자신과 공연한 적이 있는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시게티에 대한 기록에서이다. “빼어난 음악가 요제프 시게티가 피아노를 담당하고 있는 동료를, 이를테면 동격의 소나타를 연주할 경우에서라도, 마치 심부름꾼을 대하듯 하는 데에는 실망했다. (여기에서 동격의 소나타란 작곡자가 분명하게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라고 명시하고 있는 작품을 연주할 때의 경우 등을 말한다.) 나는 시게티와의 연주회에서 연미복을 입는 노릇은 시간낭비란 사실을 알았다. 그와 나 그리고 청중 사이 건반 끝에 서서 내가 청중으로부터 보이지 않게 했다. 연주를 마쳤을 때, 시게티는 나를 향하여 마치 심부름꾼을 부리듯이, 그대도 청중의 박수에 응답해도 좋다는 허락이라도 해 주는 듯, 근엄한 표정을 짓는 것이었다...나는 시게티와 함께 연습했을 때의 기쁨과 은혜를 한 순간도 잊은 적은 없다. 다만 연주회에 있어서만은 결여된 그의 인간성이 드러나고 마는 것이었다. enoin34@naver.com
    • 칼럼
    • 이상범
    2017-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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