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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스토예프스키가 죽기 직전에 한 일
    잘못된 성서 번역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죽음을 앞당기게 했다는 주장에 당장 고개를 끄덕여 줄 이가 있다면, 그는 남달리 깊은 영성을 지녔거나, 아니면 도스토예프스키를 둘러싸고 있던 당시 러시아의 속사정을 소상히 연구한 사람일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의 죽음은 상당한 신비에 둘러싸여 있다는 사실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문호 도스토예프스키가 운명한 것은 1881년 1월 28일 오후 8시경. 쉰아홉 해의 파란 많았던 생을 마감한 것이다. 사인은 폐동맥파열로 진단되었고, 그의 죽음을 미리 내다보고 있었던 아내와 친구들이 그의 임종을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눈을 감았다. 평범해 보이는 그의 임종이 도스토예프스키를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냥 지나쳐버릴 수 없는 사건으로 기억되는 데에는 이상하게도 러시아의 문인들 중에는 평안하게 제명을 살다간 이들이 많지 않았다는 징크스가 한 몫하고 있다. 푸시킨과 레르몬토프는 결투로 죽었고, 고골과 가르신은 미쳐서 죽었다. 가출해서 죽은 톨스토이는 그렇다 치고, 자살한 문인들이 있는가하면 숙청되어 처형된 이도 있는 터에, 59세의 나이이긴 해도 가족과 친지가 지켜보는 병상에서 조용히 눈을 감을 수 있었다는 것은 축복받은 최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작품에서 남달리 등장인물들의 최후를 비정상적으로 엮어갔던 도스토예프스키가 정작 자신은 평온한 죽음을 맞을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어떤 인과가 있어서가 아니었을까 하고 말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아마도 문호에 대한 사랑과 이해가 각별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그가 죽기 13시간 전, 우연이라 치부해버리기에는 너무나 미스터리한일이 있었다. 오전 7시경, 문호가 갑자기 눈을 뜨더니 곁에 있는 아내 안나 에게 겨우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오늘은 죽을 것 같아요.”하고 말한다. 그리고는 그의 만년에 자주 그랬던 것처럼, 성경으로 점을 치겠노라고 했다. 아내는 손때로 찌들은 낡은 성경을 그의 머리맡에 갖다 놓는다. 그 성경은 30년 전, 청년 도스토예프스키가 페트라셰프스키 사건에 연루되어 죄수로 시베리아로 호송되는 도중 드보리스크에서 데카브리스트(12월 당원)의 아내들이 건네준 바로 그 성경. 1823년판 러시아어 역 <신약성경>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쇠약할 대로 쇠약해진 손을 뻗어 책갈피를 넘겼다. 펼쳐진 쪽은 마태복음 3장 끝 부분에서 4장에 걸쳐 있었다. 성경 점을 칠 때에는 펼쳐진 왼편 쪽 위쪽에서 훑어 최초로 나타나는 “예수의 말씀”을 점괘로 쓰게 되어 있었다. 그가 받은 점괘는 <마태복음> 3장 14-15절로, 세례요한이 예수로부터 세례 요청을 받고 사양하는 바로 그 구절이었다.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안나가 여기까지 읽자 도스토예프스키는 그만 읽으라는 눈짓을 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지금은 말리지 말라. 즉 내가 죽는 다는 뜻이지...” (러시아역에서는 “허락하라”를 “말리지 말라”로 번역하고 있다.) 우리말 역본이나 영어역본에서는 “지금은 말리지 말라”라는 번역은 찾아볼 수 없다. 대체로 “이제 허락하라”로 번역되어 있다. 그런데 참으로 기가 찰 노릇인 것은, 러시아판 신약성서 모두가 그렇게 번역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공교롭게도 유독 1823년판에서만 그 구절이 그렇게 번역되어 있다는 것이다. 만약에 죽음을 앞 둔 문호가 성경 점을 친 성경책이 1823년 판이 아니었다면 그의 죽음은 연장될 수 있었을까? 사후에 그의 장서목록을 검토해본 결과 그에게는 1862년 이후의 개정판을 포함해서 여러 종류의 성서가 있었다는 것이 확인 되고 있다. 만약 다른 책으로 점을 쳤다면, 그래서 “말리지 말라” 가 아니라 “허락하라”로 읽었다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죽음은 적어도 수년간 연장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는 것은 부질없는 짓일까. 그랬다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애독자들이 그렇게 아쉬워하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2부도 써 줄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 않는가. 안나 부인이 <회상록>에 기록하고 있는 이 일화는 우리에게 감동을 주지만, 도스토예프스키는 바로 그 성경을 준 폰 비지나 부인에게 다음과 같이 써 보낸 적이 있었다. “설사 진리가 그리스도 밖에 있다할지라도,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enoin34@naver.com
    • 칼럼
    • 이상범
    2016-01-21
  • 너의 이름은…
    <창세기>를 무대로 활동하는 족장들에게 있어 강을 건넌다는 노릇은 오늘날 우리가 교량을 이용해서 쉽게 강을 건너버리는 것과는 사뭇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그러기에, 요단강을 건넘은 차안에서 피안으로 넘어가는 일이었고, 동양권에서의 황천 또한 같은 개념의 경계선이었던 것이다. 건널 강이 깊지도 넓지도 않아 누구든지 마음만 먹으면 쉬 건널 수 있는 강이어도, 건너에서 발붙여 사는 족속은 건너오는 자들에게 동반자도 될 수 있고 대적자도 될 수 있기에 불안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더하여 그들 선주민이 섬기는 신들은 그 결정에 큰 역할을 하고 있는 터라, 두려워하며 강을 건너는 이가 초자연적 존재와 맞닥뜨릴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생각이었으리라. 야곱은 홀로 얍복 나루에 있다.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과 딸린 식구들 그리고 모든 소유를 미리 건너보내고 난 후여서, 나름대로 도강작전은 성공적이었다고 한숨 돌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바로 그 때 야곱은 갑자기 나타난 이름 모를 타자를 맞잡고 씨름판을 벌인다. 끈질긴 야곱답게. “그가 야곱에게 물었다.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이 대답했다. ‘야곱입니다.”“야곱”이 어떤 이름이던가? 그의 탄생기록을 더듬어본다. “달이 차서, 몸을 풀 때가 되었다. 태 안에는 쌍둥이가 들어 있었다. 먼저 나온 아이는 살결이 붉은데다가 온몸이 털투성이어서, 이름을 에서라고 하였다. 이어서 동생이 나오는데, 그의 손이 에서의 발뒤꿈치를 잡고 있어서, 이름을 야곱이라고 하였다.”“야곱”은 히브리 고유의 이름은 아니었다. 고대 오리엔트 세계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던 이름 가운데 하나였다. 그리고 그 본래의 뜻은 “하나님께서 지키신다!”였고. “발뒤꿈치“를 가리키는 ”아아케브”나 “앞지르다”라는 뜻의 “야야코브”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는 것이 학자들의 소견. 그럼에도 <창세기>는 구태여 “그의 손이 에서의 ”발뒤꿈치“를 잡고 있어서, 이름을 야곱이라고 하였다.”고 명시한다. 고대 셈족은 조상을 끔찍이 존중하는 족속이 아니던가. 그런 그들이 조상의 이름을 “발뒤꿈치”와 같은 상스럽지 못한 단어로 나타낸 것은 어떤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터. “하나님께서 지키신다“는 그럴듯한 해석으로 상징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했을 터인데도 말이다. 설사 <창세기>의 기록대로, 아우가 형의 발꿈치를 잡은 채로 어미의 태에서 태어난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지키신다” 쪽으로 해석의 가닥을 잡아가는 것이 자연스러웠을 것인데도 말이다. 히브리인이 당시 오리엔트 세계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던 해석을 물리치고, 형의 발뒤꿈치를 잡고 태어난 지독한 “야곱”을 고집한 데에는 그들 나름의 절실한 바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말이다. 과연 우리의 “야곱”, “악착같은 야곱”은 그 강인한 정신으로 해서 수많은 환난과 역경을 이겨내는 한 족속의 시조가 되어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날 밤 야곱은 그 이름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되게 된다. “네가 하나님과도 겨루어 이겼고, 사람과도 겨루어 이겼으니, 이제 네 이름은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다.” 이름은 곧 정체성이다. 예수가 십자가상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하고 울부짖은 것은 그 정체성 때문이었고, 하나님의 침묵은 바로 그의 정체성을 확인해주는 신뢰요 사랑이 아니었던가. 정체성은 겸손과 같은 미덕과는 그 차원이 다르다. 정체성이 확립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겸손은 미덕이 될 수 있는 것. 그러기에 이름은 다른 누구의 이름으로 대신할 수 없다. “야곱”을 “이스라엘”로 바꾸라는 것은 겉모양을 바꾸라는 요구가 아니지 않는가. 너의 본질을 바꾸라는 말씀이다. 지금까지는 형의 발뒤꿈치를 붙들고 늘어지는 악착한 근성으로 목숨을 이어오고 종족을 이어왔지만, 이제는 나 하나님과 겨룰 줄 알아야 한다. 인간이 왜 인간이며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싸움에서 엉덩이뼈를 다친 것은 야곱이었지만 정작 진 것은 초월자였다. 너희가 나와 겨루어주면 나는 언제든지 져줄 수 있다는 뜻일까. 내가 왜 너희에게 져주지 않을까보냐! 나는 너희에게 이기기 위해서 너희의 하나님이 된 것이 아니지 않는가. 너희에게 지기 위해서 다시 말해서 너희를 너희 되게 하고자 십자가를 마다하지 않았거늘... 구약성서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광경은 솟아오르는 태양을 향해 쩔뚝거리며 걸어가는 주인공의 뒷모습이 아니던가. 그 실루엣은 한 해를 마감하며 한국의 교회들이 만들어야할 실루엣이 아닐까하고 생각해본다. enoin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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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범
    2016-01-12
  • 목걸이에 걸린 행복 혹은 진실- 모파상의 다시 읽기
    한 해를 마감하며, 모파상의 단편 <목걸이>를 떠올리게 한 것은 중국 작가 노신(魯迅)의 어록 때문. “사람들은 잊을 수 있기 때문에 점차 받은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 그렇기 때문에 영락없이 선인들의 과오를 그대로 되풀이하게 되는 것이다.” 다음 세대를 위해서라도 각자가 자신의 생각과 행위를 기록해두어야 한다는 것이 노신의 생각. 그러나 정작 우리의 현실은 손쉽게 그런 기록을 남길 수도 없거니와 남겨진 것도 탐탁스럽지가 않다. “꿩 대신 닭”이라 했던가, <목걸이>가 그러한 아쉬움을 채워 줄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않는가. “아름답고 매력적이지만, 평범한 공무원의 가정에 태어나서 비슷한 처지의 남편을 만난 여주인공은 결코 만족할 수 없는 나날을 보낸다. 어느 날, 남편이 근무하고 있는 교육부의 장관이 베푸는 야회초청장을 받은 것이 비극의 사단이 되는데... ‘스스로 매력적인 미인이라 여기고 있는 그녀에게는 남달리 보석을 좋아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야회에 입고 갈 드레스도 장식품도 없었다. 드레스는 남편이 꿍쳐 두었던 돈으로 마련할 수 있었으나 정작 그 드레스에 어울릴만한 보석이 문제였다. 마침 그녀가 수도원 시절에 함께였던 부자 친구에게서 목걸이를 빌릴 수 있어서 무도회에 데뷔할 수 있게 된 그녀는 많은 시선을 모으는 스타가 되어 멋진 밤을 보낼 수 있게 된다. 파티가 파하자, 멋지게 차려 입은 부인들을 의식해서 시간차를 두고 초라한 마차로 아파트로 돌아온다. 좁은 계단을 올라 옷을 갈아입으려는 참에야 목걸이가 없어진 것을 알게 되는데. 어쩔 수 없이 고급 보석상에서 비슷한 물건을 구해서 친구에게 돌려주기는 했지만, 그 가격은 무려 4만 프랑이나 되었다. 시아버지가 남겨준 유산을 팔아 대금의 일부를 지불하지만, 나머지는 빚이 되어 부부의 생활을 압박했다. 원금과 이자를 갚는데 꼬박 10년이 걸렸고. 어느 일요일, 우연히 목걸이를 빌려주었던 부자 친구를 만난다. ‘안녕, 잔느’ 그녀의 인사에 상대방은 옛 친구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렇게 자신의 모습이 변해있었던 것이다. ‘나 마틸다 르아젤이야.’ 그제야 알아보는 친구에게 주인공은 지난 날의 일을 고백한다. ‘그러니까 너는 대신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사주었단 말이지?’ ‘그래, 너는 눈치 채지 못했지? 똑같은 것이었거든.’ 그녀는 용케도 친구의 눈을 속일 수 있었던 것을 우쭐해 하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놀란 포레스트에 부인이 친구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불쌍하게도 마틸다! 내 것은 가짜였어. 기껏 5백 프랑 짜리였는데...’ 작가 모파상은 이야기의 여러 곳에 많은 암시를 숨겨놓고 있다. 주인공의 남편을 하필이면 교육부의 직원으로 설정한 것도 그렇지만, 아름답게 태어난 여인은 그 매력으로 해서 우아한 생활이 가능해질 수 있다는 암시에 더해, 이에 이르지 못할 경우 그 분함과 허영심이 엉켜서 사물을 판단할 이성을 마비시킬 수 있다는 암시들을 삽입한다. 부자 친구라 할지라도, 4만 프랑이나 값이 나가는 목걸이를 선듯 빌려 줄 수는 없을 것이란 당연한 판단도, 목걸이를 돌려주었을 때 제 물건이 맞는지를 확인하지 도 않는 부자친구의 몸짓은 혹시나 해볼 기회였을 터이지만, 그녀의 이성은 그럴 수가 없을 정도로 뒤틀려 있었던 것이다. “야회복 따위는 가지고 있지 않았고, 보석 따위도 없었다.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나 좋아하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자신은 그런 것들을 위해서 태어났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것만 가진다면, 얼마든지 상대방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고, 혹하게 해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을 터인데.”하는 것이 오로지 주인공의 생각이었다.우리에게는 <목걸이>로 알려지고 있는 이 작품의 원제는 <La parure>. “장식”, 액세서리 일반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작자는 왜 제목을 “목걸이(Un collier)”대신 “장식(parure)”으로 했을까. parure 원래의 의미 “장식”을 암시하려한 것은 아닐까. “장식”이란 “진실의 모습”을 감추는 짓거리가 될 수도 있는 것을. 오늘 우리의 목에 걸고 있는 “정의” “평등”을 표방하는 목걸이들은 그 가치를 변질시키는 장식이 가리고 있어 더 찬란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주인공은 목걸이를 가지게 되어, 자신의 몸을 꾸미게 되면서 예상하지 못했던 성공에 취한다. “그러나...”하는 작가의 경고는 우리가 눈여겨 읽어야할 기록이 될 수도 있으리라. 라 루슈코프의 잠언을 되씹어 본다. “행복해지는 것은 그렇게 힘든 일이 아니다. 오히려 남에게 행복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enoin34@naver.com
    • 칼럼
    • 이상범
    2015-12-30
  • 회의주의의 효능
    "반대할 주장을 지니지 않는 주장은 존재하지 않는다.”위에 소개한 어록은 몽테뉴가 그의 <수상록> 2권 15장에서 인용하고 있는 피론의 말이다. 몽테뉴는 “‘쾌락이란 순간적인 것이기 때문에 어떤 쾌락도 진정으로 즐거운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는 의견에 대해서 ‘아니다. 순간적인 것이기 때문에 쾌락은 즐거운 것이다.’”하는 반대 의견도 성립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펴기 위해서 위의 말을 인용했다는 것. 피론의 제자들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어떤 판단에도 과오가 끼어들 가능성이 있기 마련이고, 그 과오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한 방법은 오직 하나,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것“이라는 것이 스승 피론의 주장이요 가르침이었다는 것. 당사자 피론은 기원전 334년 봄, 알렉산더가 4만의 군사를 이끌고 헤레스폰토스 해협을 건넜을 때 동행했다는 3철학자 중의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알렉산더가 원정을 나서면서 장병과 더불어 철학자를 동행했다는 일화는 두고두고 화제가 되고 있지만, 대왕의 족하벌이 되는 칼리스테네스는 원정도중 바크토리아(오늘날의 아프가니스턴 근처)에서 살해되었고 아나크사르코스는 귀국 도중 키프로스 섬에서 참살되었다. 오직 피론만이 종군11년의 노고 끝에 겨우 고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렇게 전해주는 기록을 따르면, 피론의 철학은 알렉산더가 그리스에 공헌한 가장 큰 선물이었다고 한다. 피론이 자신의 철학에 인도의 사상을 섞어서 그리스에 가지고 온 것을 두고 하는 말이고 보면 무척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피론은 다크시라 거리에서 자이나 사원의 승려와 사귀는가 하면, 바라문 승려들과 대화하면서, 자이나교, 불교, 힌두교 사상에 깊이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신과 같이 마음을 고요하게 지님으로, 마음의 동요를 지켜야한다”는 피론의 사상은 인도철학에서 배워온 것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의 철학은 인도철학과 그리스철학의 융합이었던 셈이다. 피론의 사고를 대체로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인간이 행복하게 살기위해서는 먼저 “사물이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는가.”를 파악해야 하고 “우리는 그 사물과 어떤 관계에 있으며, 그 관계가 우리에게 어떤 이익을 주고 있는가.”에 대해서 생각해야한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피론은, “우리는 사물의 성질을 알 수 없다”고도 말한다. 우리는 사물을 우리의 지각을 통해서 알게 되는 만큼,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사물 그 자체가 아니고, 사물이 지각되는 양상에 따라서 달라지게 마련“이란 것이다. 요컨대 피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은 이렇다!”하고 가볍게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나의 생각으로는 이렇게...” 이상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 “우리와 사물과의 관계는 어떤 이익을 줄 수 있는가.”라는 명제에 대해서 피론은 “사물과의 관계를 인정하면 사물에 대한 불필요한 집착이 해소되고 마음의 평정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으면 “격정”에 휘말리지 않게 된다는 것이 그의 가르침의 중심인 것이다. 피론의 생각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가 왜 없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그의 생각을 “회의주의”로 몰아붙이고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사물을 너무 성급하게 “이렇다!”하거나 “저렇다!”하고 판단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자신의 판단을 절대적으로 바르다고 주장하며 양보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을 보노라면 피론의 가르침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가 우리의 머리를 식혀서, 스스로를 사로잡고 있는 격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하려면, 피론의 교훈이 더없이 요긴하리라는 생각을 해보게 되는 것이다. “반대의 논리를 가지지 않는 논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렇다면 어떤 논리도 바르지 않단 말인가? 하고 되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 발 물러서서 생각해보면 그렇게 말함으로서 우리는 오히려 피론의 손에 말려들어가 버리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보게 된다. 다시 말해서 피론을 반대함으로 피론의 말에 찬성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다. 버트란트 러셀이 말했다. “열정을 지닌 의견을 품게 되는 것은 언제나 그 의견에 그럴듯한 근거가 없을 때이다. 실제로 열정이란 그 사람이 품고 있는 의견에는 합리적인 확신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척도일 뿐이다.” 그렇게 말한 러셀은 피론의 회의론이 가지고 있는 가치는 무엇보다도 광신을 방지하는 약이 될 수 있는 말이라고도 했다. enoin34@naver.com
    • 칼럼
    • 이상범
    2015-12-11
  • 아우슈비츠의 음악대
    1937년 잘츠부르크 음악제에서, 우람한 체격의 빌헬름 프루트벵글러와 남달리 키가 작은 아르투르 토스카니니 두 거장이 만나 언쟁을 벌인다. 토스카니니 왈: “나치의 나라에서 지휘하는 자는 모두 나치이다.” 이를 받아 프루트벵글러는 “예술은 정치에 지배당하지 않는다. 베토벤이 연주되는 곳에서는 언제나 자유가 있다.”하고 응수했다. 만약에 둘의 만남이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아우슈비츠의 음악대>란 책을 읽고 난 다음이었다면 같은 말을 주고받을 수 있었을까 하고 부질없는 생각을 해본다. <아우슈비츠의 음악대>는 1948년, 프랑스에서 출간 책으로, 같은 음악가라도 유대계는 배척을 받아 마치 가축처럼 강제수용소로 보내졌던 나치 지배시절, 우연히도 음악대원으로 발탁되어 기적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시몬 랙스(Simon Laks)와 르네 쿠디(Rene Coudy) 두 사람이 펴낸 수용소 생활의 기록. 어느 날 ‘나’는 수용소에 도착한 커다란 짐짝 속에서 나무로 만든 보면대를 발견하고, 이 죽음의 수용소에 왜 보면대가 필요할까 생각했다. 장송행진곡을 위해서? 아니면 죽음의 무도회를 위해서? 나의 궁금증은 오래가지 않았다. 곧 “너희 중에 음악가가 있는가?”하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수용소에 이송되기 전, 색소폰을 연주하는 한편 편곡가로도 활동했던 ‘나“는 그렇게 아우슈비츠 음악대원 명단에 오를 수 있게 된다. 이 소식을 들은 수용소 이발사는 너는 살아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며 부러워하는 것이었다. 음악대원은 모두 35명. 하루에 두 차례, 새벽에 수용수가 작업하러 나갈 때와 저녁 무렵 그들이 돌아올 때 연주했다. 그 밖의 시간에는 노동에 참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가스실과 총살을 면할 수 있게 되었다고는 하나, 언제 위기가 닥쳐올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에서 ‘나’는 열심히 연주하며 간부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독일군의 유대인 학살은 계속되었다. 수인들이 가스실이나 사형장에 끌려갈 때도 우리는 연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더러 친위대원들과 수용소 간부들의 파티에 불려가 연주하기도 했고, 사령장관 슈바르츠 후버의 탄생일을 위해서는 특별연주회를 열기도 했다. 어느 여름날 오후, 수용소 간부들의 요구를 따라 독일 오페레타의 서곡을 연주하고 있었을 때, 솔로에 열중하는 프룻 주자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그렇게 열중함으로서 비참한 현실에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다하는 표정 말이다. 그래서 그는 몸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여자들을 실은 트럭행렬이 화장터로 달려가는 것도 보지 못한다. 실려 간 여자들 가운데는 그의 딸도 섞여 있었는데 말이다. 비유대인인 선임자 악장이 권리를 남용하다가 개처럼 끌려가 목숨을 잃는가하면, 음악대와 친하게 지내던 집시들이 어느 날 갑자기 자취를 감추는 일도 있었다. 또, 사령장관이 화려하게 차려입은 아내와 일여덟쯤으로 보이는 아들 형제를 데리고 와서는 행진곡을 연주하라 명령했을 때는 “왜 우리에게는 그의 명령을 거부하고 그의 두 아들을 끌어다 불 속에 던져 버릴 용기가 없는가?”하는 생각을 하며 자조하기도 했다. 그러니 연주가 어찌 아름다울 수 있었겠는가. 연주는 슬픔과 증오가 얽힌 영혼의 갈등이 번져나가는 그런 음악이었다.그러나 ‘나’는 아우슈비츠에서의 상상을 초월하는 특이한 일만이 아니라, 삶의 기본적인 조건이 철저하게 박탈되고 있는 지옥 같은 세계에서도, 인간의 삶이 끈질기게 이어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생활이 놀라우리만큼 일상적으로 영위되고 있었다는 사실도 기록한다. 몰래 식량과 생활필수품은 물론 귀금속의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 생각해 보면 참으로 기이한 일이지만, 하루에 수백 수천의 인간을 살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음악을 열렬히 사랑하며 음악대원들과 친해지려 하는 독일 친위대원이 있었다는 것은 더욱 기이한 일이 아니겠는가. 무엇보다도 음악을 통해 이루어진 그들과의 한 가닥 인연으로 해서 아우슈비츠 음악대에 속한 유대인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음악활동은 “엄격한 규율 밑에 있는 수용소의 활동이 빈틈없이 진행하기 위한 일인 동시에, 수용수들을 감시하는 친위대를 즐겁게 해서 그들의 사기를 돋우어주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우슈비츠에도 최후의 순간이 온다. 소장은 떠나면서 말했다. “나의 음악대여!”하고. 물론 그는 체포되어 죄수가 되지만 수용수들은 해방된다. 그러니 나치를 낳은 독일 민족과 그들의 희생이 되었던 유대민족이 더불어 다른 민족들에서는 볼 수 없는 깊은 음악적 유대를 유지하고 있다는 특이한 현실을 이해하는 일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enoin34@naver.com
    • 칼럼
    • 이상범
    2015-12-04
  • 대림절(Advent)을 위하여…
    옛날, 이탈리아 피렌체에 라니에로라는 사나이가 살고 있었다. 남달리 힘이 센 그는 성품이 난폭해서 싸움이라면 마다하는 법이 없었다. 아내 프란체스카도 남편의 난폭을 견디다 못해 끝내 친정으로 도망 가버리는데... 거칠고 지기 싫어하는 사나이 라니에로도 아내 사랑만은 남달랐던지, 이래저래 달래 보았으나 아내는 집으로 돌아와 주지 않는 것이었다. 궁리 끝에 용병이 되기로 작정한다.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우면 전리품을 얻을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을 피렌체의 대성당에 있는 성모 마리아상 앞에 갖다 바친다면 신앙이 깊은 아내가 돌아와 줄 것이라 여긴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아내의 마음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사나이는 공적이 모자란다고 여겼던지 그때 막 바람 불기 시작한 십자군 전투에 참여하기로 마음먹는다. 이슬람으로부터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전투에서 크게 공을 세운 그가 보상으로 예루살렘 그리스도의 성묘를 밝히고 있는 횃불에서 불씨를 얻어 자신의 등에 옮겨 붙일 수 있는 특전을 허락받게 된다. 당시 그것은 가장 소중한 전리품이었던 것이다. 사나이는 그 등불을 멀리 이탈리아까지 모셔갈 작정을 한 것이다. 동료들은 입을 모아 반대했다. “아무리 힘이 센 자네라할지라도 그 등불을 들고 가서 피렌체의 성모마리아상 앞에 바칠 수는 없을 것”이라며 놀려대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동료들의 빈정거림에 화가치민 사나이는 오히려 절대로 불을 끄지 않고 피렌체까지 등을 가지고 가겠노라 장담하고 나선다. 예루살렘에서 피렌체까지, 그렇게 등불을 끄지 않고 옮겨가는 세상에서 드문 여행이 시작된 것이다. 막상 여행은 장사 라니에로에게도 생각했던 만큼 수월한 일은 아니었다. 거꾸로 말 등에 올라앉아 외투로 바람을 막으며 천천히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얼마 되지 않아 도적을 만난다. 여느 때라면 말에서 뛰어내려 한주먹 먹이면 만사가 해결될 일이었으나 등불을 지키자니 그럴 수도 없는 노릇, 어쩔 수 없이 도둑이 달라는 대로 아끼던 말과 갑옷을 내주고는 너덜너덜한 옷을 걸치고 말라빠진 말 등에 흔들리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사람들의 놀림은 날로 심해갔다. 당장 말에서 뛰어 내려 본때를 보여주고 싶지만 등불을 지키기 위해서는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등불을 모셔가는 라니에로의 여행은 이어졌다. 여행을 통해서 사나이는 많은 것을 체험하게 된다. 지금까지 살아온 그의 인생에서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들이었다. 아주 약한 바람에도 쉬 꺼져 버릴 것 같은 가냘프기 짝이 없는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오히려 많이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도 불같이 타오르는 분을 참아야 하는 것이 분하고 서글펐다. 그러나 분노와 증오로서는 그 작은 것을 지킬 수가 없다는 것을 터득해가게 된 그는 가장 싫어했던 굴욕도 참아내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마저 깨닫는다. 그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었다. 곧 꺼져버릴 것 같은 작은 등불을 지키며 한발 한발 나아가는 나그네 길을 통해서 그는 점차로 변해가고 있는 스스로를 느끼게 된다. 다툼보다는 평화를, 거침보다는 온유를, 미움보다는 용서를 소중히 여기며, 연약한 것을 돌보는 사나이로, 그는 변해가고 있는 것이었다.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작은 등불이 남달리 우람한 한 사나이를 그렇게 바꾸어갔다는 것이 <횃불>이야기의 골자. “등불이 꺼진들 부싯돌만 있으면 곧 되살릴 수 있을 터인데...” 사나이는 그럴 수가 없었다. “예루살렘의 불과 피렌체의 불이 다를 것이 무언가”하고 말할 줄도 몰랐다. 그 우직스러움이 가냘픈 등불을 그 등불 그대로 지켜올 수 있었으리라. 우직함은 어느 틈엔가 온유함으로 바꾸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대림절을 맞으며 <횃불>을 되씹는 것은 어느 틈엔가 우리에게서 없어져가고 있는 그 무엇이 아쉬워서 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대림절은 잃어버린 그 무엇을 되찾게 하는 계절일 지도 모르고.셀마 라겔뢰프(Selma Ottilia Lovisa Lagerl?f, 1858-1940)는 스웨덴 출신의 여성작가. 풍부한 상상력과 모성적 애정을 바탕으로 많은 작품을 낳았다. 청소년이 읽도록 썼다는 <닐스의 이상한 여행>이 특히 많이 알려진 것은 1909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게 했기 때문일 것이다. 위에서 소개한 <횃불>은 그녀의 <그리스도 전설 집>에서 옮겨온 것. enoin34@naver.com
    • 칼럼
    • 이상범
    2015-11-20
  • 소금으로 맛을 내어
    “외부 사람들에게는 지혜롭게 대하고, 기회를 선용하십시오. 언제나 친절하게 유익한 말을 하고, 묻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적절한 대답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말은 소금으로 맛을 내어 언제나 은혜가 넘쳐야 합니다. 여러분은 각 사람에게 어떻게 對答해야 마땅한지를 알아야 합니다.”(골로새서 4장 1-6).바울은 크리스천이 교회 밖 사람들에게 해야 할 말을 음식조리법에 비유하고 있다. 나의 미각이나 사정을 따라서가 아니라, 우리가 말을 전해야할 상대방의 미각과 문화적 토양에 까지 관심을 기울이며, 사정을 따라 알맞게 소금을 치라는 충고로 받아들이고 싶다. 역지사지(易地思之)하는 마음의 자세를 말하는 것일 것이다. 뛰어난 요리사가 될 수 있는 기본자세는 역지사지에 있다. “내가 전하는 말씀은 절대 진리”이니, “나의 말은 진리이고 평화이니” 무조건 받아 들여야 한다는 식의 데모꾼의 외침일 수는 없다는 뜻이 아닐까. “소금으로 맛을 내어 언제나 은혜가 넘쳐야한다”했다. “언제나” 하는 말은 늘 그런 준비가 되어 있어야한다는 말일 터. 차라리 그런 체질이 되어 있어야한다는 말로 이해해 보자. “은혜가 넘쳐야한다”는 말은 소금으로 맛을 냈으면, 그 맛의 효과가 제대로 상대방이 동의하고 즐거워하는 바가 되어야한다는 말로 새겨본다. 혀끝에 닿는 맛은 그 사람의 표정을 바꾼다. 곁에서 보는 사람도 그가 뭣을 맛보았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지경이다. 혀끝으로 단 맛을 맛본 얼굴과 혀뿌리로 쓴 맛을 느낀 표정은 사뭇 다르다. 혀의 양옆에서 신맛을 맛본 표정 또한 다르다. 신맛을 접한 얼굴과 단맛을 맛본 표정은 사뭇 달라서 바라보는 다른 사람도 얼른 감을 잡을 수가 있다. 짠 맛이라면 더 그렇다. 소금으로 맛을 낸다고 하는 노릇은 확 소금을 뿌려 썩지 않게 간을 하는 방부처리가 아니다. 소금은 달콤한 맛에 가까워지기도 하지만 반대로 소태맛에 가까워지기도 한다. 그 양과 솜씨에 따라 사뭇 달라진다. “고등어자반”이란 것이 있다. 생선을 제대로 먹어볼 수 없었던 내륙 안동지방에 사는 사람들이 즐기던 소금으로 간을 친 고등어를 일컫는데, 오늘날에는 거의 모든 지방 사람들이 덩달아 즐기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그게 아무나 조리할 수 있는 게 아니란다. 좋은 스승을 따라 적잖은 시간 훈련을 쌓은 손에서만 제대로 된 “고등어자반”이 생산된다는 것이다. 맛은 인간의 표정을 바꾼다. 그리고 감정을 움직이게 한다. 그리고 그러한 동작이 쌓여가노라면 인간의 성격을 더 복잡하게 바꾸어가게 마련이다. 아비의 미각은 자손에게 전해지고 어미의 먹거리는 태아의 성격형성에도 영향을 미친다지 않는가. 히브리인의 성격과 표정을 형성해온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는 그들이 먹어온 음식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바울이 그리스도교회가 세계를 향해서 제공할 수 있는 “말씀”이 어떠해야할지를 충분히 고려한 나머지 내뱉은 말이 아니겠는가. 요한 12장,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여인 이야기에서, 한 여인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기어이 배신자가 될 유다에 대한 비난을 첨가하는 것 까지는 그래도 그 일의 중요성을 부각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의미에서 수긍이 간다고 하더라도, 6절에서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사람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가 도둑이어서 돈 자루를 맡아가지고 있으면서 거기 넣은 것을 훔쳐 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라고 까지 모진 소리를 한 것은 요한기자의 짓궂은 악의가 두드러지는 장면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런 모양의 보도가 결국에는 유대인을 핍박하는 구실로 이어졌다는 설은 제법 설득력을 얻고 있기도 하다. 소금으로 맛을 낸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가슴에 굳이 상처를 내기 위해서 이기보다는 소금으로 맛을 내어 우리들의 이야기를 잔잔하게 가꾸어간다는 뜻일 것이다.유럽을 여행하다 보면 ‘전신만신 성모 마리아’판이란 느낌을 가지게 된다. 예수는 저만큼 비껴 있어 유럽의 그리스도교회는 마리아교가 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역지사지하는 마음으로 접근해보면 나름대로는 소금으로 맛을 내려했던 중세 그리스도교의 심정을 이해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지금까지 한국의 기독교신학은 소금으로 맛을 내는 여유까지를 가꿀 수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럴수록 더욱 알맞게 소금으로 맛을 내는 솜씨를 터득해야하지 않을까 싶다. enoin34@naver.com
    • 칼럼
    • 이상범
    2015-11-12
  • 피그말리온 효과
    피그말리온은 기원전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등장하는 키프로스의 왕이었다. 살아있는 모든 여성에게 실망한 왕이 손수 상아를 깎아 만든 여인상을 바라보며 살아가는데, 그녀가 옷을 걸치고 있지 않는 것을 부끄럽게 여길 것이라 생각하고서는 옷을 입혀주기까지 한다. 자신이 만든 조각물을 실재하는 인간 이상으로 사랑하고 몰입하는 한 사나이의 이야기에서 운을 띄우기 시작한 “피그말리온”이야기는 훗날 상상도 못했던 방향으로 발전한다. 하마터면 인간이 아닌 인형을 편애하는 소위 “피그말리온 콤플렉스”의 자료 정도로 묻혀있을 뻔했던 이야기가 화려하게 20 세기의 무대조명을 받게 된 것은 익살꾼 버나드 쇼가 1912년에 <피그말리온>이란 희곡을 완성하면서다. 희곡 <피그말리온>은 곧 <마이 페어 레이디>라는 뮤지컬이 되어 여러 버전으로 변신을 거듭하다가 1964년에는 오트리 헵번이 주연하는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로 많은 영화팬들의 주목을 받게 되는데, 내용인즉, 낮은 신분출신의 소녀 일라이자가 비긴즈의 도움으로 언어습관을 고쳐 레이디로 변신하지만, 자아에 눈을 뜨고 그의 곁을 떠난다는 줄거리의 변주들이다. “피그말리온”이 교육심리학의 이론으로 변신한 것도 이 무렵. 1964년 미국의 교육심리학자 로버트 로젠타르가 “인간에게는 남에게서 기대 받은 만큼의 성과를 내는 경향이 있다”는 주장을 하면서 주목을 받게 된 이론 말이다. 그의 이론은 미국의 심리학이 대체로 그렇듯이 실험을 통해서 얻어진 결론이라고 했다. 1963년, 로젠타르와 동료 포드가 학생들에게 쥐를 이용한 미로실험을 실시했다. 실험용 쥐를 넘겨주면서, 한 집단에게는 “이 쥐는 잘 훈련을 받은 영리한 계통의 쥐”라는 정보를 주고, 다른 집단에게는 “이 쥐는 형편없는 쥐”라는 귀띔을 주었다. 실험결과 두 집단 사이에 주목할 만한 차이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각각 다른 정보를 받은 학생집단이 쥐를 다루면서 동원한 방법과 기대감의 차이가 실험결과에 반영된 것이라고 로젠타르는 생각했다. 이런 결과는 학생집단과 쥐에서 만이 아니라 교사와 학생 사이에도 있을 수 있는 일일 것이라 생각한 로젠타르는 이듬 해 교육현장에서 실험을 실행한다. 한 초등학교에서 “하버드식 돌발성학습능력 예측 테스트”라는 그럴싸한 이름을 붙여가며 실시한 테스트였지만, 내용은 일반적으로 시행하고 있는 지능테스트와 다를 것이 없는 것이었다. 학급담임교사에게는 “차후 수개월 사이에 성적이 나아지는 아동을 찾아내기 위한 검사”라는 설명을 해두었다. 그러나 실제 검사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암시에 불과했다. 검사결과와는 관계없이 무작위로 선발된 아동의 명부를 학급담임에게 보여주면서 “이 명부에 올라있는 아등은 차후 몇 달 안에 성적이 올라갈 아동”이라고 귀띔해둔 것이다. 그런데 명부에 이름이 올라있는 아동의 성적이 분명히 향상하고 있었다는 것. 보고논문의 주장에 따르면, 성적이 올라간 원인으로서는 담임교사가 명부에 올라있는 아동에 대해서는 기대감을 가지고 대했다는 사실과 아동 편에서도 자신이 기대를 받고 있다고 의식하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피그말리온 효과>라 명명된 실험결과는 더러 비판을 받기도 했다. 재시험을 한 결과 이러한 효과는 인정할 수 없다는 반론도 있었다. 그럼에도 미국은 물론 우리나라 교육기관이, 공교육 사교육 할 것 없이, 상당한 반향을 불러 모았던 것이 사실이다. 지금도 인터넷을 뒤지면 <피그말리온 효과>를 빙자한 특수교육의 선정문구를 쉽게 대할 수 있다. 당시의 교회가 이 이론을 그냥 내버려두었을 리 없지 않는가. 교회성장과 헌금수입에 선용(?)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피그말리온 효과”란 “인간이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게 되는 것은, 자신에 대한 다른 사람의 평가나, 자신을 대해주는 다른 사람의 태도에서 영향을 받는다.”는 심리학 법칙이다. 쉽게 말해서, 인간은 자신이 어떻게 대접받는가에 따라서 자신의 언동을 바꾸게 된다는 것. 이 이론을 근거로 하는 “피그말리온 효과에 따른 동기부여“라고 하는 것은 상대를 다루는 태도나 방법을 조정함으로서 상대의 부적절한 언동을 적절한 언동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동기부여를 해보려는 노릇이다. 2천년도 전에 예수는 대접을 받고자 하거든 남을 먼저 대접하라 했지만. 요즘 날로 험해져는 정객들의 말씨를 대하면서, 그들에게 <피그말리온 효과>를 테스트 해보면 어떨까 하고 생각해보게 된다. 혹 기대하지 못했던 버전이 축출될지 누가 알겠는가. enoin34@naver.com
    • 칼럼
    • 이상범
    2015-10-30
  • 군주와 군자
    <춘추(春秋)>에는 “송공(宋公=양공(襄公)이 초(楚)나라 군사와 홍(泓)에서 싸워 송이 패했다.”는 아주 짧은 전쟁기록이 있는데, 후세 사람들이 이 기록을 두고 서로 엇갈리는 평가들을 남기고 있어 흥미롭다. <공양전(公羊傳)>에서는, 송과 초 두 나라가 홍수(泓水) 기슭에서 싸우기로 약속했던 모양으로, 송의 양공이 먼저 현장에 도착해서 상대를 기다리고 있는 참에, 초나라 군대가 허둥지둥 강을 건너는 장면을 목격한다. 양공의 측근이 “적군이 홍수를 건너버리기 전에 공격하자”하고 권했지만, 주군의 반응은 달랐다. “군자는 사람을 곤궁에 밀어 넣지 아니하는 법, 적군이 미쳐 대열도 가추기 전에 공격하는 것은 비겁한 짓”이라면서 공격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초군이 강을 건너긴 했지만 미쳐 진영을 가다듬지 못하고 있는 틈을 노려, 이를 기회로 잡아야 한다는 측근의 귀띔도 거절한다. “군자는 상대 진영이 정돈되지 않았는데도 진격명령을 내리는 비겁한 짓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마침내 초군의 진영이 정돈된 것을 보고서야 전투개시의 북을 울린다. 그러나 양공이 이끄는 송의 군대는 대패하고 말았다. 훗날, <공양전>은 양공이 큰일을 앞두고도 “예”를 저버리지 않은 것은 훌륭한 처사였다고 평가했다. 송이 패한 것은 “훌륭한 군주는 있었으나 그에 걸 맞는 신하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더해서 “문왕(文王)이라할지라도 그렇게 훌륭한 싸움은 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찬사를 덧붙였다. 고대에는 편전(偏戰)이라 해서, 미리 약속해둔 시기와 장소에서 양 진영이 전열을 가다듬은 후에, 북소리로 전투를 시작하고 징소리로 마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공양전>에서는, 양공이 기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못 본 채, 적군이 진영을 가다듬을 때를 기다려, 북과 징으로 시작하고 마치는 ‘편전’의 약속을 지켰기에, “‘군자’의 인의(仁義)를 귀히 여겨 대례(大禮)를 지켰다”고 칭찬한 것이다. 한편 <곡량전(穀梁傳)>은, 그 전투가 송의 양공이 지난 해 초나라에 사로잡힌 적이 있어서 그 수치를 설욕하기 위한 복수전이었다고 풀이하는가 하면, <좌씨전(左氏傳)>은 송의 양공이 맹주로서의 체면을 지키려고 초나라를 공격했고 이에 질세라 초나라의 성왕(成王)이 맞선 싸움이었다고 풀이한다. 그러한 상황해석으로 해서 <곡량전>과 <좌씨전>은 <공양전>의 것과 사뭇 다른 평가를 내린다. “적에 비해 우세하면 공격하고, 필적할 만하면 맞서 싸워야하지만, 불리하면 방위 전으로 대처해야 하는 것이 전장에서의 상식이거늘, 요행만을 의지해서 이겨보려는 싸움은 있을 수 없다. 매사에는 기회가 있게 마련이고, 이를 잘 이용해야 기세를 잡을 수 있는 법. 그럼에도 ‘도리’에만 매달려서 주어진 기회를 놓치고 기세를 잡지 못하면서, 도대체 무엇을 하려 하는가. ‘시(時)’와 ‘세(勢)’를 잡지 않고서는 ‘도(道)’를 성취할 수는 없는 법” <양곡전>은 제대로 시세를 판단할 줄도 모르는 무능한 군주 양공을 맹비난한다. <좌씨전>의 비난도 만만치 않다. “송나라 백성이 모두 양공을 비난하자, 양공은 ‘군자는 부상한 자를 따라 잡지 아니하고, 백발이 성성한 노인을 붙잡지 않는 법. 즉 사람을 곤궁으로 밀어 넣지 아니한다. 우리 송나라는 주(周)에게 멸망당한 은(殷)나라의 자손이 책봉된 나라이긴 하지만, 적군의 틈을 노려 공격할 정도로 나약하지는 않다.’하고 말했다. 이에 자어(子魚)가 대꾸했다. ‘군주께서는 전쟁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고 있소. 강적 초나라가 어려움에 처해있는 시기는 바로 하늘이 우리에게 베풀어준 절호의 기회이거늘, 할 일없이 그 기회를 놓친다면 전쟁을 이길 수는 없는 것이오. 전쟁이란 적을 죽이는 노릇일 뿐 다른 아무 것도 아니라오. 부상자나 노인을 불쌍히 여겨 도와주는 것만이 군자의 도리라면, 처음부터 전쟁은 하지 말고 굴복하는 것이 좋았지 않소.”훗날 사마천은 송공의 군자다움을 칭찬하면서도, 나란히 자어의 반론을 인용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또 송나라 군대가 대패해서 양공 자신도 부상을 입는 처참한 결과를 맞게 되자, 모든 국민이 양공을 원망했다는 <좌시전>의 서술도 인용했다. <한비자(韓非子)>의 평가는 아주 날카롭다. “양공은 백성을 사랑하지도 않았거니와 신하를 사랑하지도 않았다. 다만 들은 풍월에 놀아나 작은 의(義)에 사로잡혔을 뿐이었다.” enoin34@naver.com
    • 칼럼
    • 이상범
    2015-10-27
  • 군주와 군자
    <춘추(春秋)>에는 “송공(宋公=양공(襄公)이 초(楚)나라 군사와 홍(泓)에서 싸워 송이 패했다.”는 아주 짧은 전쟁기록이 있는데, 후세 사람들이 이 기록을 두고 서로 엇갈리는 평가들을 남기고 있어 흥미롭다. <공양전(公羊傳)>에서는, 송과 초 두 나라가 홍수(泓水) 기슭에서 싸우기로 약속했던 모양으로, 송의 양공이 먼저 현장에 도착해서 상대를 기다리고 있는 참에, 초나라 군대가 허둥지둥 강을 건너는 장면을 목격한다. 양공의 측근이 “적군이 홍수를 건너버리기 전에 공격하자”하고 권했지만, 주군의 반응은 달랐다. “군자는 사람을 곤궁에 밀어 넣지 아니하는 법, 적군이 미쳐 대열도 가추기 전에 공격하는 것은 비겁한 짓”이라면서 공격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초군이 강을 건너긴 했지만 미쳐 진영을 가다듬지 못하고 있는 틈을 노려, 이를 기회로 잡아야 한다는 측근의 귀띔도 거절한다. “군자는 상대 진영이 정돈되지 않았는데도 진격명령을 내리는 비겁한 짓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마침내 초군의 진영이 정돈된 것을 보고서야 전투개시의 북을 울린다. 그러나 양공이 이끄는 송의 군대는 대패하고 말았다. 훗날, <공양전>은 양공이 큰일을 앞두고도 “예”를 저버리지 않은 것은 훌륭한 처사였다고 평가했다. 송이 패한 것은 “훌륭한 군주는 있었으나 그에 걸 맞는 신하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더해서 “문왕(文王)이라할지라도 그렇게 훌륭한 싸움은 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찬사를 덧붙였다. 고대에는 편전(偏戰)이라 해서, 미리 약속해둔 시기와 장소에서 양 진영이 전열을 가다듬은 후에, 북소리로 전투를 시작하고 징소리로 마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공양전>에서는, 양공이 기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못 본 채, 적군이 진영을 가다듬을 때를 기다려, 북과 징으로 시작하고 마치는 ‘편전’의 약속을 지켰기에, “‘군자’의 인의(仁義)를 귀히 여겨 대례(大禮)를 지켰다”고 칭찬한 것이다. 한편 <곡량전(穀梁傳)>은, 그 전투가 송의 양공이 지난 해 초나라에 사로잡힌 적이 있어서 그 수치를 설욕하기 위한 복수전이었다고 풀이하는가 하면, <좌씨전(左氏傳)>은 송의 양공이 맹주로서의 체면을 지키려고 초나라를 공격했고 이에 질세라 초나라의 성왕(成王)이 맞선 싸움이었다고 풀이한다. 그러한 상황해석으로 해서 <곡량전>과 <좌씨전>은 <공양전>의 것과 사뭇 다른 평가를 내린다. “적에 비해 우세하면 공격하고, 필적할 만하면 맞서 싸워야하지만, 불리하면 방위 전으로 대처해야 하는 것이 전장에서의 상식이거늘, 요행만을 의지해서 이겨보려는 싸움은 있을 수 없다. 매사에는 기회가 있게 마련이고, 이를 잘 이용해야 기세를 잡을 수 있는 법. 그럼에도 ‘도리’에만 매달려서 주어진 기회를 놓치고 기세를 잡지 못하면서, 도대체 무엇을 하려 하는가. ‘시(時)’와 ‘세(勢)’를 잡지 않고서는 ‘도(道)’를 성취할 수는 없는 법” <양곡전>은 제대로 시세를 판단할 줄도 모르는 무능한 군주 양공을 맹비난한다. <좌씨전>의 비난도 만만치 않다. “송나라 백성이 모두 양공을 비난하자, 양공은 ‘군자는 부상한 자를 따라 잡지 아니하고, 백발이 성성한 노인을 붙잡지 않는 법. 즉 사람을 곤궁으로 밀어 넣지 아니한다. 우리 송나라는 주(周)에게 멸망당한 은(殷)나라의 자손이 책봉된 나라이긴 하지만, 적군의 틈을 노려 공격할 정도로 나약하지는 않다.’하고 말했다. 이에 자어(子魚)가 대꾸했다. ‘군주께서는 전쟁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고 있소. 강적 초나라가 어려움에 처해있는 시기는 바로 하늘이 우리에게 베풀어준 절호의 기회이거늘, 할 일없이 그 기회를 놓친다면 전쟁을 이길 수는 없는 것이오. 전쟁이란 적을 죽이는 노릇일 뿐 다른 아무 것도 아니라오. 부상자나 노인을 불쌍히 여겨 도와주는 것만이 군자의 도리라면, 처음부터 전쟁은 하지 말고 굴복하는 것이 좋았지 않소.”훗날 사마천은 송공의 군자다움을 칭찬하면서도, 나란히 자어의 반론을 인용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또 송나라 군대가 대패해서 양공 자신도 부상을 입는 처참한 결과를 맞게 되자, 모든 국민이 양공을 원망했다는 <좌시전>의 서술도 인용했다. <한비자(韓非子)>의 평가는 아주 날카롭다. “양공은 백성을 사랑하지도 않았거니와 신하를 사랑하지도 않았다. 다만 들은 풍월에 놀아나 작은 의(義)에 사로잡혔을 뿐이었다.” enoin34@naver.com
    • 칼럼
    • 이상범
    2015-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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