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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한국교회 전도만이 살길이다
    코로나19가 한창이던 지난해 9월 장로교 107회 총회에서 명확히 드러난 문제는 한국교회 성도수가 급격히 감소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2022년 한 해 동안 감소한 성도수는 예장통합이 34,000여 명, 합동이 90,000여 명, 고신이 13,000여 명을 비롯, 주요 장로교단에서만 최소 20여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외 군소 교단을 전부 조사한다면 그 숫자는 생각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이대로 가다 간 한국교회에 정말 큰 사단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지금 전국 6만 교회에 안수 받은 전임 목회자만 20만 명이 넘는다. 이들에 대한 생활비만 해도 엄청난 예산이 필요한데, 교세가 급감하니 자연히 헌금도 줄어들 것 아닌가. 그러면 목회자를 모실 수 없는 교회가 늘어나고 가족을 부양해야 할 목회자들은 세속 직업을 찾아 교회를 떠나는 사태가 생길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사회에는 아직도 우리의 복음을?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3천만이 넘게 남아 있다. 이들에게 전도해야 한다. 전도를 금지하는 법률이 있던 시대에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도 전도에 목숨을 걸었는데, 대한민국처럼 전도가 자유로운 사회에서 교인이 줄어들고 교회가 위기를 맞고 있다는 것은 뭔가 우리 한국교회에 문제가 있다는 말이 아닌가? 오늘날 우리사회에는 보편적 교회에서 이단시 되는 '사이비' 집단이나 신흥종교가 오히려 전도에 열을 올리고 있고, 막상 '진짜 복음'을 가졌다는 기성교회는 잠잠하고 있다. 마치 물고기가 스스로 물 따라 떠밀려 와 그물 안에 들어온 것만 잡는 정치망 어업처럼, 교회당 지어 놓고 그 안에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설교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교회당 밖에 사람들이 모두 우리교회 예비 신자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코로나 이후 한국교회가 우선적으로 나설 일은 주일예배에 참석하지 않는 교인들과 교회를 떠나 행불자가 된 옛 교인들을 찾아 심방하는 일과 주일학교로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전도하는 일에 모든 힘을 경주하는 일이다. 가능하면 지역의 교회들이 초교파적으로 힘을 모아 전도에 나서는 것도 좋다. 개교회는 총동원 전도에 목표를 정하고 모든 교인의 체계적인 전도훈련이 필요하다. 그 길만이 한국교회가 살아 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리고 다시 말하거니와 교회의 존재 이유와 그 사명은 전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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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3-03-27
  • [사설] 한국교회가 경계할 것들
    한국기독교는 이제 그 역사가 140여 년에 이른다. 이 기간 기독교는 우리사회의 주류종교로 자리잡았다. 6만여 개의 교회와 1천만 신도가 사회적 기능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사회에 기독교만한 역동적 종교집단은 아직은 없다. 그런데 문제는 한국교회가 그 신행(信行)에 있어서 많은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기독교는 신행 즉 믿음(信)과 행함(行)이 일치할 때 비로소 바른 신앙(正信)이 되는 것이고, 그것이 일치하지 않을 때 그 신앙은 사이비 신앙(似而非 信仰)이 되는 것이다. '사이비'란 겉모양은 비슷하나 그 본질은 전혀 다른 가짜를 이르는 말이다. 이단(異端)은 교주우상주의나 정통교리에서 이탈한 현상임으로 쉽게 분별하고 판단할 수 있지만, 사이비는 그 분별이 쉽지 않다. 사이비 신앙에는 기복주의나 맹신주의 또는 신비주의 등도 있지만, 이보다 더 무서운 사이비는 교회의 사유화, 교회의 상업화, 교회의 정치화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에는 이 교회의 사유화, 교회의 상업화, 교회의 정치화 현상이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런 것이 교회의 타락이다. 300여 개로 갈라진 교단의 분열을 틈타 교회간판을 달고, 교세를 확장하고, 교인들의 헌금으로 부동산을 늘려 그것을 사고 파는 목회자들, 교회를 마치 세속적 상업주의 집단처럼 운영하는 대형교회들, 또 애국을 빙자해 교인들을 선동하고 헌금을 제 멋대로 사용하는 교회지도자들이 그런 부류이다. 이런 교회지도자들은 신앙이 아니라 돈 몇 푼씩 들고 다니며 그것을 흔들어 보이며 나를 따르라고 한다. 지금 한국교회에 에큐메니칼운동이 실종되고, 연합과 일치가 파괴된 배경에도 이런 자들의 행태가 있다. 한국기독교는 지금이 대단히 중요하다. 교인들이 피땀 들여 지은 많은 교회당이 이단집단으로 넘어가고 있고, 일부 세속적 욕심을 앞세우는 목사들에 의해 사유화 되어 가고 있다. 소위 정통교단에 속한 교회들도 여차하면 교단을 탈퇴하고 무소속으로 도망간다. 그리고는 기회를 보다가 교회당을 팔고 목사가 그 돈을 챙겨 깔고 앉는 것이다. 거기에 실망한 교인들은 욕하며 교회를 떠나간다. 그들은 교회당만 떠나는 것이 아니라, 교회도 떠나고 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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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3-02-27
  • [사설] 한기총 이단 논쟁 좀 더 넓은 시각으로 바라보길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는 새해 벽두부터 자체 내부 인사의 이단 논쟁으로 분쟁에 휩싸이고 있다. 한기총 이대위는 지난해부터 한기총 대표회장을 지낸 전광훈 목사와 공동회장을 지낸 김노아 목사에 대한 이단 조사를 해 왔다. 전광훈 목사에 대해서는 광화문 태극기 집회 등에서 행한 "하나님 나한테 까불면 죽어" 라는 등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성 모독과 자신을 신격화 하고 교주화 하는 명백한 이단사상이 있고, 김노아 목사에 대해서는 사람이 죽은 후 그 영혼이 즉각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는 등 "비성경적 주장과 성경에 반하는 주장들을 한다"면서 이단으로 규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한때 한기총을 대표하던 대표회장을 지내거나 공동회장을 지낸 실세들이라는 점에서 한기총이 어쩌다 이런 사태에 휘말리게 되었는지 답답함이 있다. 더우기 전광훈 목사가 대중집회에서 자신이 "성령의 본체"니, 또는 설교를?통해 자신의 아들이 "독생자"니 하는 이상한 용어를 남발해 오해를 살만한 일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앞뒤 문맥을 살펴 볼 때 신학적 용어를 함부로 내뱉은 '사이비적' 요소는 있으나, 이는 딱히 '이단설'을 주장하는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는점에서 이런 사태가 재발하지 않도록 엄히 '경고'하고, 또 김노아 목사에 대해서는 그의 주장이 일부 역사적 기독교의 보편적 신학적 해석과 다른 점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 성경적 문자주의에 근거한다는 점에서 논쟁의 주제는 될지언정 이단 사상이라고는 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한기총 이대위가 좀 더 넓은 시각으로 이 문제를 처리함이 옳다고 본다. 왜냐하면, 한국교회는 지금 연합단체의 통합 논의가 시급한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기총이 이단 논쟁으로 또 다른 분열을 자초하는 것은 매우 현명하지 못할 뿐 아니라, 새해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에 있어서도 손실이라고 보이기 때문이다. 본란에서 항상 강조해 왔거니와 한국교회의 이단은 지도자를 신격화 하는 '교주우상주의'와 삼위일체에 대한 '고대 에큐메니칼 교리 위배'와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론을 부정하는 '신신학'. 이 세 가지 유형의 이단이 있다. 이 외에는 성경 해석적, 신학적 견해 차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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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3-02-27
  • [사설] 한국교회 연합운동 통합논의 회개가 우선이다
    한국기독교는 미국의 교파주의 교회를 그대로 이식한 상태로 발전해 왔기에 다양항 교파주의 교회로 유지되고 있다. 그래서 일찍이 '선교사공의회' 때부터 교파간 연합운동에 힘을 기울였다. 그것이 오늘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교회협, NCCK)의 전신이다. 이후 교회협의 인권운동과 대북선교에 대한 불만 등, 80년대 들어 국내 정치적 영향으로 탄생한 것이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였다. 즉 교회협은 대체로 한국교회의 진보적 교회의 입장을 대변하고, 한기총은 보수적 입장을 대변했다. 교회협과 한기총은 서로를 보완하면서 한국기독교를 대표해왔다. 그래도 그 때까지는 상당히 바람직한 면이 있었다. 문제는 에큐메니칼 교단이라고 불리우는 예장통힙측이었다. 대교단 통합측은 교회협과 한기총에 양다리를 걸치고 양쪽에서 한국교회 대표행세를 하다가, 2012년에 이르러 아주 사소한 이유로 합동측의 한기총 운영에 대한 불만을 품고 있을 때, 머리통이 텅 빈 무책임한 몇몇 교단 지도자들이 '한기총이 이단을 풀려 한다'는 이단감별사들의 세 치 혓바닥에 선동되어 한기총을 분열시켜 한국교회연합(한교연)이라는 새로운 연합단체를 만듦으로써 한국교회의 에큐메니칼 운동이 위기를 맞은 것이다. 이후 에큐메니칼 운동은 갈갈이 찢어진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것이 오늘의 한국교회 현실이다. 그러나 개교회주의와 교단이기주의가 심긱한 한국교회가 살 길은 교단간 연합, 즉 에큐메니칼운동 밖에 없다. 그런데 그게 한번 갈라지기는 쉬어도 하나로 합하기는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보수 연합단체의 통합 논의에서 보여주고 있다. 교회연합 운동에서 가장 무서운 사탄은 분열이다. 2023년 새해에도 연합단체의 통합운동에는 이렇다 할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분열에 대한 회개가 우선되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기총은 법원에서 파송한 대표회장 임시체제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고, 대교단들이 빠져나간 한교연은 군소교단 연합체로 전락하고,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은 대표회장 선거에 정치적 야합 의혹이 일어 혼란을 겪고 있다. 진정한 회개 없이는 성령의 역사를 기대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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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3-02-27
  • [사설] 성경은 많이 읽어야 한다
    역사적 기독교는 시대마다 두 가지 주체에 의해 이끌려 왔다. 하나는 '성령'이고, 또 하나는 '성경'이다. 초대교회는 성령이 사도들을 부흥현장으로 내몰았고, 성경이 확정된 중세교회는 성경이 부흥을 이끌었다. 그러다 교리논쟁에 휩싸여 성령도, 성경도 교권의 통제를 받게 되자, 교회는 곧바로 이단정죄의 시대를 겪었다. 이 시기를 역사는 '가톨릭 암흑 시대'라고 한다. 이때 다시 역사에 새로운 빛을 비추기 시작한 것이 성경이었다. 종교개혁 시대의 주제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었다. 성경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기독교의 모든 규범은 이 성경에서 나온다. 따라서 목회자는 성경을 깊이 상고해야 한다. 아무리 재능있는 설교자라도 성경을 많이 읽어 성경에 능통한 사람을 능가할?수는 없다. 어떤 종교의 지도자이든 그 경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그 종교를 제대로 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기독교의 경전은 66권의 신구약 '성경'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목회자가 되려면 최소한 이 성경 66권은 제대로 통달해야 한다. 그냥 성경을 아는 것이 아니라, 창세기로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는 성경의 맥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 장절을 다 외울 수는 없어도 창세기 하면 창세기 각 장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명확히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성경을 많이 읽어야 한다. 수십독, 혹은 수백독 성경을 읽어 눈 앞에 훤히 그 내용이 춤을 추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성경을 많이 읽었다고 해서 반드시 그 성경을 제대로 이해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성경은 해석이 필요한 책이다. 중요한 것은 그 성경을 역사적 기독교가 어떻게 해석해 왔는가를 먼저 알아야 한다. 사도 시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기독교의 성경 해석을 무시한 채, 자신이 어느 날 성경에 대해 깨달음을 얻었다며 자의적 해석을 하는 것은 성경을 해석하는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신학적 훈련이나 성령의 조명 없이 성경을 많이 읽었다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 바로 여기에 있다. 미래 교회를 이끌 신학생들이나 새로운 목회길에 나서는 젊은 목회자들에게 성경을 많이 읽을 것을 권한다. 한글성경뿐 아니라, 영어나 독일어 또는 원어 성경 헬라어나 히브리어도 해독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성경은 66권을 다 보편성으로 읽어야지 어느 특정 책만을 편식하는 것은 좋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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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2-12-30
  • [사설] 한국 기독교인들의 양심의 문제
    아직도 우리사회에 복지 사각지대에서 경제적 무게를 견디다 못해 생을 마감하는 극단적 선택자들이 있다. 올해만 해도 4월에 서울 창신동 모자 사건, 8월에 수원 세 모녀 사건, 또 지난달 서울 신촌 모녀 사건 등이 언론을 통해서 알려졌다.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우리사회에서 이런 안타까운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동사무소나 지역 행정 당국에서도 파악하지 못하는 복지 사각지대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대도시에서는 그들이 드러내 놓고 자기의 사정을 말하기 전에는 그 어려움을 알기가 어렵다. 행정체계 안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반드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동사무소 복지사들이 놓칠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을 눈여겨보고 관심 깊게 살펴보는 것이 교회나 종교계가 할 일이다. 성탄절이나 연말연시 뿐만 아니라 평소에 교인들을 통해 소외된 이웃을 살펴야 한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교회 헌금 25%는 교회 내 어려운 이웃을 위해, 또 25%는 교회 밖의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사용할 것을 권면했다고 한다. 16세기 칼빈의 시대의 경제 사정은 오늘날 우리시대와는 많이 다르다. 그럼에도 교회의 헌금 절반을 어려운 이웃에 사용하자고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이 칼빈의 개혁교회의 전통에 따라 운영되는 장로교 중심의 교회이다. 따라서 우리도 칼빈의 정신대로 교회헌금을 소외된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사용함이 옳다. 또 개인적으로는 평소에 행정장국의 정상적 시스템으로는 어떤 지원도 받지 못하는 복지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들을 돕기 위한 구호단체 등에 소액이라도 후원하여 내가 가진 것을 나누는 정신을 발휘해야 한다. 직업을 가졌거나 소득이 있는 사람이면 한 달에 1만원 정도는 누구나 후원할 수 있다. 그것이 모이면 긴요한 일에 크게 쓰일 수 있는 것이다. 복지 사각지대에서 경제적 어려움으로 극단적 선택을 하는 사건이 더 이상 생겨나서는 안된다. 특히 이 문제는 한국 기독교인의 양심의 문제이기도 하다.
    • 연지골
    • 사설
    2022-12-30
  • [사설] 안전불감증이 가져온 대참사
    지난달 말 핼러윈데이에 이태원에서 벌어진 대참사는 대한민국 같은 나라에서는 절대 일어나서는 안되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어떻게 그 좁은 골목에서 수백명이 떠밀려 압사할 수 있단 말인가. 이는 우리사회가 아직도 안전불감증에 빠져있음을 대변하는 것이다. 그동안 산업현장에서 안전불감증으로 얼마나 많은 인명을 잃고 '안전, 안전'을 강조해 왔는가. 그런데도 아직 우리사회에?안전의식이 미약해 벌어진 일이다. 온 국민은 이번 이태원 사건에 있어서 특히 경찰의 조치에 크게 실망하고 있다. 10만 군중이 모인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경찰은 질서유지를 위해 이태원 파출소에 겨우 137명만 배치했다고 한다. 이 열 배 1370명을 배치해도 모자랄 판인데, 경찰은 처음부터 안전 문제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경찰에도 안전에 대한 메뉴얼이 있을 터이지만, 이 날 이태원에는 그 메뉴얼도 지켜지지 않은 것이다. 사실 오늘날 대한민국 정도 되면 국민의식에서 안전 제일주의가 우선이어야 한다. 그럼에도 국민의식은 거기에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우리사회의 치안은 세계적으로 안전하다고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노동현장에서는 아직도 안전사고가 끊임없이 발생하고, 이태원 참사 같은 일이 벌어지니 국가적 차원에서 전국민 안전교육이 절대로 필요하다. 사후약방문으로 사고가 난 후에 비로소 '재발방지'만 외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되풀이 되어서는 안된다. 국민안전의식에 대한 근본적인 대안이 제시되어야 한다. 그것은 교육밖에 없다. 유치원부터 시작되는 공교육 기관에서의 교육뿐 아니라, 동네 노인정에 이르기까지 범국민적 안전교육이 절실하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이번 이태원 사건에서 보여준 것은 오늘날 국가 공직자들의 국가관이나 직업에 대한 사명감이 매우 의심받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은 국가 공직자들이 뼈아프게 받아들여야 할 심각한 문제이다. 세계 10대 경제력과 문화를 수출하는 대한민국의 공직자의 정신세계가 그 수준에 미달한다면 사회발전에 오히려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 공직을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한 수단쯤으로 여기는 자들이 그 직을 원할히 수행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근본적이고 구조적 변화가 필요하다.
    • 연지골
    • 사설
    2022-12-30
  • [사설] 건강한 한국교회를 지향하며
    본보는 이달로 1991년 11월,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라는 에큐메니칼운동을 표방하고 창간된 지 31주년이 되었다. 창간 이후 약 29년 간은 거의 매주 발간 해 오던 것이 코로나 정국을 맞아 지난 2년 간은 한 달에 한두번 겨우 명맥만 유지할 수 밖에 없었다. 직원도, 경제력도 모두 잃었기 때문이다. 교계에는 모든 행사가 사라지고, 기자가 취재를 하려 해도 사람을 만날 수 없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지난해에는 애독자들에게 구독료도 제대로 청구하지 못한 채로 지나갔다. 그래도 이만큼 버틴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며 감사한다. 실은 교계 문서선교, 특히 주간지 발행은 돈이 많이 드는 일이다. 인건비는 기본이고, 종이값과 인쇄비, 그리고 발송비가 독자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훨씬 부담이 많다. 특정 교단이나 단체에 소속하지 않은 순수 연합지는 모두 광고비와 구독료와 뜻있는 독자들의 후원금으로 충당되고 있다. 그러나 항상 부족해 다음 주 신문은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게 된다. 그럼에도 때가 되면 또 한 호의 신문이 발행된다. 그러니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것이다. 현재 교계에는 크게 두 종류의 신문이 발행되고 있다. 하나는 특정 교단의 회보로서 교단지이고, 다른 하나는 순수 교계언론으로서 연합지이다. 교단지는 교단의 후원으로 운영되는 신문이고, 연합지는 본보와 같이 일체의 특정한 후원이 없이 살아가는 신문이다. 그 편집방향이 다를 뿐 둘 다 중요하다. 바로 교계의 역사를 기록하는 문서선교운동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계언론을 교계의 거울이라 한다. 거울에는 피사체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 얼굴에 때가 묻었으면 묻은 대로, 어느 한쪽이 찌구러졌으면 찌구러진 대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런데 그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더럽다거나 찌구러졌다고 해서 거울을 깨뜨려버릴?필요는 없다. 자신의 얼굴을 닦으면 된다. 그러므로 교회는 교계언론을 중요시 해야 한다. 그런데 요즘에는 교계가 경제력이 크지면서 광고조차 교계언론을 외면하고 대부분 영향력이 많은 일반 상업지로 간다. 교계가 일년에 한번만이라도 연합지에 광고를 지원해 주어 교회와 함께 가게 해야?한다. 이것이 한국교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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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2-12-30
  • [사설] 사명자의 정계성
    정계성(定界性)이란 일정한 한계 또는 정해진 경계를 뜻한다. 정해진 선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사회적 규범을 말하는 것이다. 신명기 34장에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해방시켜 40여년 간 광야로 인도한 지도자 모세가 여리고 맞은 편 모압 평지에 그 백성을 남겨 둔 채 느보산에 올라 죽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느보산은 모압 평지 뒷산이다. 그런데 성경은 "모세가 죽을 때 나이 일백이십세니 그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신 34:7)라고 한다. 사람이 죽는 것은 사고를 당했거나, 병들었거나, 늙어 수명이 다했거나 했을 때 일어나는 일이다. 모세는 사고를 당한 것도, 병든 것도, 늙어 수명을 다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 이제 요단만 건너면 하나님이 그토록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겠노라고 약속한 젖과 꿀이 흐르는 땅, 모세가 그토록 들어가고자 했던 가나안 땅이 있는데, 모세는 자기 발로 걸어서 올라간 느보산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을 네가 바라보기는 하려니와 그리로 들어가지는 못하리라"(신 32:52)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거기서 죽었다. 이것이 사명자의 정계성이다. 하나님께서 '너는 여기까지만' 이라고 한 곳에서 멈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정계성을 깨닫지 못해서 오히려 하나님의 역사를 망친 사명자들이 많다. 민족의 지도자 모세가 요단강을 건넜다면 이스라엘 역사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아마도 모세나 그 아들들이 중심이 된 세습왕국이 건설되고, 하나님은 더 이상 그 역사에서 설 자리가 없었을 지도 모른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정착 후 모세의 아들들이나, 여호수아의 아들들에게 특별한 우대를 하지 않았다. 오늘날에도 물질과 명예와 교권에 눈이 멀어 '너는 여기까지만'이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외면하고 버티다 교회도 망치고, 자신의 명예도 잃는 사명자들이 있다. 이것은 비단 교계에만 적용되는 말이 아니다. 국가나 사회 전반의 지도자들에게도 이 정계성이 필요하다. 모세는 꿈에도 그리던 가나안을 눈 앞에 건너다보면서 느보산에서 죽었지만, 그는 영원한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었다. 사명자는 그 정계성을 지키는 한, 내가 가진 꿈과 비전을 이루지 못했다고 실패한 것은 결코 아닌 것이다.
    • 연지골
    • 사설
    2022-09-27
  • [사설] 기독교계 인권운동 단체들의 침묵
    인권국가인 대한민국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과 탈북어민 강제 북송 사건은 대한민국이 국제사회에서 잔인한 비인권국가로 매도되고 있는 심각한 문제이다. 이 두 사건은 명백히 인권 문제와 관련된 사건임에도, 여야 정치권은 이를 놓고 같은 증거를 두고도 전혀 서로 다른 소리를 하고 있다. 매일 터지는 언론 보도도 여야가 다르게 해석한다. 그런데 우리가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은 정치권의 서로 다른 소리보다, NCC를 비롯한 기독교계의 인권운동 단체들이 이같이 심각한 인권과 관련된 국민의 의혹에 일체 침묵하고 있다는 점이다. 국민들은 여야 정치권의 이 논쟁을 보면서 심각한 혼돈 상태에 빠져 있다.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귀순 진정성이 의심되어 북송했다는데, 눈이 가려지고 손이 포승에 묶인 채 판문점으로 강제로 끌려가 군사분계선을 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사진들은 무엇인가? 이는 당시 문재인 정부가 국민을 철저히 속인 사건이 아닌가 하는 강한 의심이 든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계 인권단체들은 구 정부쪽이든, 신 정부쪽이든 최소한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국민들의 이 의심에 대해 명백히 밝히라는 요구만이라도 해야 옳다. 그것이 우리사회의 책임있는 주류 종교단체가 해야 할 일이다. 그럼에도 기독교계 어디에서도 이 문제를 거론하지 않는 것은 또 어떤 연유에서인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의 연속이다. 이 중대한 인권 문제에도 침묵한다면 교계연합단체들이나 각 교단 인권운동기관들은 무엇을 위해 필요한 것인가? 아무런 구실도 못하면서 무슨 인권위원회니 하는 명함만 들고 다니며 예산만 낭비할 바에야 해체함이 마땅하다. 특히 탈북어민 강제 북송 사건은 그 진실이 밝혀지지 않은 채 그냥 뭉개고 간다고 해결될 문제는 결코 아닌듯하다. 살인 혐의를 받고 있는 '흉악범' 둘을 송환한 것으로 끝날 것 같지는 않은 매우 민감한 국제적 사건으로 비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 연지골
    • 사설
    2022-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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